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 9]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 9]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칸국과 러시아의 등장 

지난호(8회)에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의 원형이 되는 카자흐칸국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즉,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영역이었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서 떨어져 나온 한 유목집단이 15세기 중반, 서서히 남하하여 현재의 알마티주(세레레치예 지역)과 시르다리아강 중류 지역을 주요 거점으로 해서 카자흐칸국을 세웠다는 것과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번호에는 카자흐 현대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카자흐칸국 성립(15세기 중반) 후부터 18세기까지 카자흐초원과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다.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의 화려한 반격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카잔칸국, 크림칸국, 아스트라한칸국, 시비라칸국 등으로 분열되었다는 말은 이미 지난호에서 언급했다. 분열된  칸국 중에는카자흐칸국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한 나라가 5개로 쪼개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거, 몽골의 대칸이나 킵차크칸국의 칸을 대리하여 러시아계 공국들로 부터 세금징수업무를 대행하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서서히 힘을 키워나갔다. 드디어, 16세기 중반(1552년) 볼가강 중류 유역의 요충지 카잔을 공격하여 카잔칸국을 멸망시켜버렸다. 이는 오랫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계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반 4세가  이 승리를 기념하여 현재까지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 있는 바실리 대성당을 건립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가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이 전쟁 승리 4년 후 모스크바공국은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볼가강의 하류 유역에 자리잡은  아스트라한 칸국도 병합하고 종가인 킵차크칸국의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다.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공국은 이후 ‘짜르 러시아’로 국가면모를 일신하고 러시아인들에게는 ‘짜르’로서, 주변의 유목민들에게는 ‘위대한 벡 차간 칸’으로 간주되었다. 세계사에 러시아의 등장을 알린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통치하던 카잔 칸국의 유민을 타타르라고 부르고 그 후에 정복한 주변 유목민들도 오랫동안 이 이름으로 통칭했다. 타타르 라는 명칭은 옛날 몽골의 침략에 질린 유럽 지식인들이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타르타루스(그리스어로 지옥에서 온 사람)와 몽골을 구성하는 유명한 부족인 타타르를 동일시하여 몽골 전체에 부여한 이름인데, 러시아인도 이를 답습하여 타타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볼가-우랄 지역의 사람들은 그 후에도 계속 타타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말에는 항상 러시아를 괴롭힌 ‘야만인’이라는 뉘앙스가 따라 다녔다.

요컨대, 카자흐칸국의 성립과 러시아의 등장은 킵차크칸국이라는 중앙권력의 약화와 함께 시기적으로 큰 시차없이 이루어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억압 ‘동화정책

러시아는 자신이 차지한 볼가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러시아 귀족과 수도원 또는 도망온 러시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서 타타르인들은 이주해온 러시아인들 때문에 오히려 거주지와 직업에 제한을 당하게 되었고 18세기 말 무렵에는 인구가 역전되어 러시아인이 인국의 52%를 차지하고 타타르인들은 42%에 불구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러시아정교의 포교를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개종자에게는 면세특권을 주거나 죄를 사면해주는 방법으로 개종을 유도하는 한편, 반무슬림정책을 펼쳐 한때는 카잔 부근에 있었던 모스크 약 70%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타르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을 떠나 카자흐초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중앙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타타르인 디아스포라’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이들은 카자흐초원의 현대사 전개에 있어서 러시아인들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18세기말 중앙유라시아쪽을  눈을 돌린 예카테리나 여제는 동방영토의 안정과 동방무역의 확대를 위해 타타르인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주고 이는 상업을 장려하는 등 실용주의적인 포용정책을 폈다. 이 결과 타타르인들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동방의 이웃 사람들과 친근함을 무기로  러시아인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카자흐  초원과 투르키스탄에서  상권을 확대했고  이들 가운데는  초원을  돌아다니는  잡화상에서부터  대규모 대상 무역을  하는 거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인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동방에서 양모, 피혁, 면사를 가져오고,   러시아에서 직물,  금화,  금속 제품을  가져와서 팜으로써  러시아와  중앙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상업망을  구축했다.

타타르의 부흥

킵차크칸국의 수도가 있었고 주우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중심 거점이었던  볼가강유역과 우랄지역에는 상업으로 거부가 된 타타르인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자신이  모든 재산을  고향에  모스크와  마드레사를  짓고 유지하는 비용에 기꺼이  내놓았다. 또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투르키스탄, 특히  이슬람교학의  중심지인  부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러시아의 통치하에  쇠퇴한 이슬람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부하라유학을 통해서  러시아문명의  도전에 대항해서  이슬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이슬람  해석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무슬림도  근대과학과  러시아어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러시아 당국이 초기에  취했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개종화를  중단하고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을  러시아와(정교화)하고  그들 사이에  러시아문화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  영향 받은 바 크다.  

카자흐초원의 병합

러시아는 카잔 칸국을  손에 넣고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16세기 말에는 주치 후예를  군주로 추대한  시비르  칸국을 병합하고 18세기 초부터는  카자흐초원  북쪽에서  부터 군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 변경방위와  무역의 거점 역할을  동시에  했다.

이때 큰  활약을  한 이들이  바로 ‘코사크’들이다.  카자흐 초원에  러시아의 패권을  수립하는데 첨병의 역할을 한 이들은 러시아 농민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15~6세기에 러시아의  동남부 변경지대로 도망간 러시아  부랑민들이 투르크계 종족들과  접촉하면서 생겨난  특이한 집단이다.  원래 ‘카자흐’와  똑같은 어원 즉, ‘모험자’, ‘독립적이고 얽매이지  않는  백성’을  뜻하는 투르크어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인들은  양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카자흐인에게 ‘키르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들은 이른바  ‘키르기스-카자흐’인데,  카자흐인은  러시아 혁명  후  1925년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명칭은  카자흐와  본래  키르기스  사이에  혼동을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러시아 세력이  카자흐  초원북쪽에 다다를  무렵  유목  카자흐는 이미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하고 서쪽에서  부터 차례로 소쥬즈, 중쥬즈, 대쥬즈라고 불리는  3개의  부족  연합체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카자흐의  최대 위협은  같은 유목민인  준가르(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서몽골계 유목집단)의  침략과 약탈이었다. 타쉬켄트, 투르키스탄, 사이람 등  카자흐인의 거점도시들에 대한 침탈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1730년 소쥬즈의  아불 하이르 칸은  러시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원하고 이를 계기로  다른 쥬즈의  칸들도 그의 전례를 따랐다.  이는 준가르의 약탈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안보와  통상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외교전략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러시아는  카자흐 초원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미  권위를 상실한  소쥬즈와  중쥬즈의  칸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원  동남부에  퍼져  있던 대쥬즈의  정치 지도자들도 러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당국은 이렇게 차례로 러시아령에  편입된 카자흐  초원을 악몰린스크, 세미팔라찐스크,  세미레치예,  우랄스크,  투르가이,  시르다리아 의  여섯게 주로  나누고 이  중  일부를  ‘옴스크’에  소재한 초원 총독부 관할 아래 두었다.  

요컨대, 카자흐 초원과  러시아는  오래전부터역사적으로 연결성을  가져오고 있었지만 킵차크칸국이라는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놓이면서  좀 더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이는 변방의 작은 공국이었던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지위를 차지한 후에도그 관계는 계속되었고 19세기  부터 펼쳐지는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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