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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성의 날에 떠오르는 이름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해마다 3월 초가 되면 카자흐스탄의 꽃가게들은 대목을 맞이한다.  ‘세계여성의 날(3월8일)’을 맞아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과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할 꽃을 사기 위한 남성 손님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공휴일인 8일보다 하루 전날에 여성 동료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부서마다 작은 파티를 열어 여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가정에서는 남성들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다.

20세기 초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에서 유래되어 1975년 UN이 3월 8일을 공식적으로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구소련국가들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데 봄맞이 축제의 성격도 겸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축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시작되어 1945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딱히 명분이 없어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제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이 공개적으로 기념되지 못했다. 역대 정권이 이 날을 사회주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으로 여겼고 또한 여성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행사를 치룰 수 있게 되었고 2018년에 비로소 ‘여성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여성의 인권과 권리에 대해 얼마나 둔감한 가부장적인 사회였는지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평등이 실현되었고 특히나 한 자녀를 둔 가정의 증가로 인해 아들 딸 구분없이 모두 다 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차별과 혐오가 있고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해 공적영역에서 전면적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아쉽다.

펠르랭과  알렉산드라 빼뜨로브나

2012년 프랑스에서 장관이 된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펠르랭. 한국 이름은 김종숙이며, 태어난지 3~4일만에 서울의 길거리에 버려졌다가 고아원에 들어갔고 생후 6개월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2012년 중소기업·디지털경제 담당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후 통상국무장관을 거쳐 ‘문화대국 프랑스’의 문화 행정을 책임지는 문화부장관 등 3년 반 동안 3개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퇴임 후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기사)장을 경제 부문에서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신문과 방송은  “한국인이 프랑스 장관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그녀가 성장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자신을 외국으로 입양보낸 나라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그녀의 ‘화려한 성공’과 ‘위대한 한국인’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그녀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랑스인이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었다.

사실, 펠르랭보다 먼저 외국에서 여성장관이 된 재외동포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한세기나 앞서서… 그녀의 이름은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그녀의 이름은  <소련 공산당 역사> 제2권에 10월혁명과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아르만드, 아르쮸히나 등의 여성 혁명가들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고,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백과사전에도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선역사> 제2권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는 1885년에 니꼴쓰크 – 우수리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금지된 마르크스작품을 탐독했다.  1914~1917년 수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우랄의 사업장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탁월한 혁명가이자 국제주의자였으며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던 첫 한인 여성공산당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공식 자료는 이게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김 마뜨웨이 찌모페이비치가 쓴 <원동에서 소비에트주권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1918~1922)>이란 책에 그녀에 대해 그나마 조금 기록되어 있지만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교원 우 블라지미르는 최대한 문헌자료, 친척들 그리고 혁명가와 함께 투쟁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회상기 등에 기초하여 그녀의 삶을 재현한 후 고려일보에 기고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의 시넬니코보 한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중철도 건설장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조서인 철도건설 노동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만인산》과 《왕정산》이라는 비단으로 만든 우산을 선물했다고 한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블라디보스톡의 오빠에게 온 16세의 김 알렉산드라는 독서에 탐닉하며 열정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검은 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그녀는 러시아의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게르첸이나 체르느이쉐프스키 등의 사상서적들을 탐독하며 미래의 혁명가를 꿈꾸었다.

노동자의 통역가에서 대변자로

결혼과 출산, 자녀양육을 하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가던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혁명 직전,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수천명 규모로 모집했던 우랄지방의 나제쥔스키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체불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속에서 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민족 차별까지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유창한 러시아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노동자들의 입이 돼 주었고, 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면서 서서히 이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된다. 이를 기초로 그녀는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김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최초의 한인여성 사회민주노동당원(볼셰비키)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라는 제1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대표자회의(1917년 9월)에 참가하는 등 곧바로 당 및 소비에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12월 김알렉산드르는 크라스노쉐코프가 지휘하는 극동소비에트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르는 3월에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과 주축이 되어 한인사회당과 적위군을 조직했다.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에 능통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그 혁명적 지도력을 인정받아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1차대전 포로문제와 관련한 혁명사업들, 조선인, 중국인, 헝가리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주의부대 편성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편 1918년 8월말 극동지역의 내전상황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정권을 붕괴시킬려는 미,영,독,프 등 서구 열강과 함께 일본은 외국간섭군으로는 가장 대규모인 7만명의 육군을 연해주에 파견했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홍범도 부대 등의 항일독립군부대를 이 기회에 소탕하겠다는 목표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18년 8월 25일-28일기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제5차 극동지역 노동자대회에서 일시 전선을 포기하고, 한인 혁명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1918년 9월 2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일단의 한인혁명가들은 백위파 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죽음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

김 알렉산드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어 ‘죽음의 객차’에 감금되었다. 칼믜코프의 백위파군들에 의해 그녀는 엄청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혁명열사로서의 기백을 보였다.  

9월 14일 새벽 4시. 백위파 군인들은 ‘죽음의 객차’에서 눈을 가린 채 김 알렉산드라와 사회노동위원 티쉰, 하바로프스크시 재판소장 네페도프를 끌어냈다.

티쉰과 네페도프는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 알렉산드라를 양쪽에서 부추기고 수많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총살당한 일명 ‘죽음의 골짜기’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 던지며 외쳤다.

“(너희들은)  내가 여자이고 둘째로 내가 조선 여자이니까 끝까지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숨을 바치며 지킬려는 신념은 로씨야에서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총살 직전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여덟 발자국만 걷게 해 다오” 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왜 하필 여덟발자국이냐”라고 되묻자   “내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팔도라고 들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조선 팔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소비에트 만세! 볼셰비키 만세! 자유조선 만세! 세계혁명 만세!”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시체는 아무르강으로 굴러 떨어지고 아무르강의 차가운 물속에 붉은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1918년 9월 14일 33세의 청년 김알렉산드라는 그렇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2009년, 그녀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불꽃같이 살다간 조선의 자랑스러운 딸,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조국애와 수정 같이 순결한 그녀의 신념은 자손만대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앞서간 여성 혁명가들과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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