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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신문방송인협회 주최 국제 심포지움 발표문]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과 고려인의 통일의식

김상욱 (한인일보 발행인)

1.머리말

2.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사

3.인터넷(러시아어) 나타난 홍범도 

4.홍범도와 고려인의 통일의식

5.결론을 대신한 제안

1.머리말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지난 광복절인 8월 15일 새벽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공항을 이륙한 유해는 같은 날 저녁 대한민국공군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공항에 도착하였다.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이 장면은 홍범도 장군이 소망하던 독립된 조국이 이제는 스스로 고국산천과 겨레를 지킬 수 있는 강한 군대를 가졌음을 홍장군에게 보고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공항에 직접 나와 홍범도 장군을 영접했고, 16, 17일 양일간 국민추도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서거 78년만에 비로소 고국 산천에 몸을 누였고 지난 30년동안 유해 봉환을 놓고 펼쳐졌던 남북간의 외교전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우리 정부가 카자흐스탄과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와 끈질긴 노력, 특히 문재인대통령의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친서 전달을 통해 보인 진심이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고려인 동포사회에 전달되어서 성사될 수 있었다. 이는 동시에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남한이 세련된 실력으로 승리한 것이고 자연스럽게 국력을 다시 한번 과시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반면, 남북관계는 하노이 노딜 이후 계속된 불신과 정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그 전까지 대결과 전쟁 위협으로 치닫던 남북/북미 관계가 급반전을 이루어, 도보다리회담으로 상징되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평양 9.19 공동성명’으로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가득했던 때와는 상반된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남측은 남북대화와 교류의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해 여러 제안들을 했으나 북측은 미국이 북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없다는 점과 남북정상간 합의한 한미 군사훈련중단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버젓이 훈련이 재개되었다는 점을 들며 한/미의 그 어떤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9월 유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종전선언’을 제안하면서 북측에 진정성 있는 대화 시도를 한 결과 최근 남북 통신선 복원과 함께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한국의 정보책임자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이 미국과 러시아 출장을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남북관계의 새로운 변화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다가오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평화적으로 개최하고 싶은 중국의 입장과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한 긍정적인 국제정세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민족적 역량 즉, 대결과 전쟁 대신 종전과 평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국민적 여론 형성과 국제사회를 향한 강한 의지표명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이중에서도 민족적 역량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재외동포의 역할이 주목되는데,  만약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문이라는 종전 선언의 의미를 자각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여론화한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본고는 재외동포사회 중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을 뿐 아니라 촉매로써 역할을 할 수 있는 고려인의 통일 의식에 대한 연구이다. 특히, 최근 이루어진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과정이 양국 대통령의 큰 관심과 최고의 국가적 예우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현지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 SNS 를 통해 접하게 된 고려인 차세대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는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연구는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과 통일 의식에 대한 선행연구와 문헌 분석을 토대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전후의 현장 인터뷰에 의한 경험적 조사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2.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사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고 경복궁을 복원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는 한편 해외에 묻혀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유해봉환사업도 강하게 추진하였다. 이런 국가적 분위기속에서1994년 홍범도 유해봉환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유해 봉환의 시작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얻어낸 대통령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정부 때부터였다.  노태우대통령은 이전 군사독재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려고 애썼고 그 중 한가지 방법으로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봉환사업을 통해 정권의 차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실제로 중국에서 운명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유해 중 일부가 발굴되어 국내에 안치되었다.

1992년 카자흐스탄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한국은 1년 뒤인 당시 초대 대사였던 김창근 대사를 홍범도 장군의 묘역이 있는 크즐오르다로 보내 국내 봉환을 추진했고 1995년 12월 28일 크즐오르다에서는 홍범도 기념비 건립 개막식이 있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에 대한 고려인 동포사회내의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면서 날카로운 논쟁이 일어났다.  즉, 한국으로 모셔 갈려고 하는 한국정부의 의지와 홍범도 장군의 고향인 평양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선 것이었다.  한국정부의 유해 봉환의 의지를 전하는 김창근대사는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워 홍범도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고려인은 홍범도가 누구인지 모른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홍범도장군의 묘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홍범도 재단’의 김레프 이사장은 고려일보에 쓴 기고문을 통해  “카자흐스탄 고려인인들은 민족 영웅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고려인협회와 동포사회는 홍범도 기념비를 세우고 그에 대한 기억을 영구보존하는 일에 협조하라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면서 한국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동포사회의 일각에서는 서울이 아닌 평양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과 서울도 평양도 아닌 연해주로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등장하면서 혼돈에 빠졌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배경에는 한국정부의 유해 봉환 시도가 있자 북측에서도 외교적 경로를 통해 평양으로의 유해 봉환을 요구해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민족 분단이라는 현실이 항일독립투사 홍범도의 귀향과 영면을 가로막고 나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있었다면 이런 논란은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례 문제는 후손들의 의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독립운동과정에서 홍범도 장군의 장남과 부인이 모두 일제에 의해 희생되고 홀로 남은 차남마저 요절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고려인 협회가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시, 고려인협회는 현상유지를 주장하며 그대로 안치할 것을 지지하였고 한국 정부는 카자흐스탄의 의사를 따른다는 공식적 입장을 밝히면서 유해봉환 의지를 걷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3.인터넷(러시아어)상에 나타난 홍범도 

고려인은 불행하게도 모국어를 상실한 동포사회이다. 즉, 러시아어로 생각하고 대화한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한국어나 카자흐어, 우즈베크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된 콘덴츠에 익숙해져 있고 자신들도 러시아어로 콘덴츠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홍범도에 대한 인식에서도 큰 장애물로 나타난다.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한국 인터넷 에 올라있는 한글로 된 홍범도에 관한 콘덴츠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구글에서 한국어로 ‘홍범도’를 검색해보면 109만개의 콘덴츠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러시아어로 홍범도를 쳐서 검색해 보면 아래에서와 같이 6만 8100개 의 콘덴츠가 올라와 있다. 결국 한국어 콘덴츠가 러시아어 콘덴츠에 비해 무려 16배나 더 많을 뿐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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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러시아어 인터넷의 홍범도에 대한 자료의 출처를 분석해 보면,  정부기관(시청, 주) : 5% 고려인 디아스포라 : 27%,   언론 : 21%,   비즈니스 : 2%,   민간단체와 고려인 NGO : 10%,   개인 홈피 : 1%,   문화단체와 기관(극장, 도서관 등) : 14%,   대학과 협회 : 4%,   기타 : 1% 이다.

     내용별로 홍범도에 대한 웹자료 분류를 하면, 안내서, 과학연구자료(일반, 전문), 문학작품, 극장예술, 조형미술품, 거리와 사회재단와 잠수함 명칭, 사진과 비디오 등이다.

4.홍범도와 통일의식

홍범도라는 인물은 남과 북에서는 항일독립운동가로 존경받고 있고 고려인도 자신들의 민족영웅으로 간주하고 있다. 남과 북 고려인 모두에게 존경받는 특이한 인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홍범도는 한국민들에게 있어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고려인들은 한국사를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역사 속의 인물보다는 현대사의 한 가운데서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홍범도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몽골인들에게 징기스칸, 터키인들에게 케말 아타튀르크, 볼리비아인들에게 시몬 볼리바르,  이탈리아  쥬세페 가리발디 등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려인 차세대들의 민족 정체성 고양과 통일 의식 함양에 있어서 홍범도는 이들 인물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고려인 동포사회에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먼저, 러시아 말로 쓴 장편소설, 중편소설 및 시들이 있고, 홍범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고려극장의  연극 ‘빠르티잔(의병들)’이 무대에 올려졌고 최근까지도 삼일절 행사 때나 홍범도 장군의 기일에 즈음하여 공연되고 있다.

동포 신문인 고려일보에도 홍범도의 기일인 10월 25일을 즈음해서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고 홍범도와 관련 학술 세미나를 통해 그의 삶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는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독립투쟁 과정에 마친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동포사회의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했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광복을 앞둔 1943년 크즐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묻힌 뒤 고려인들과 옛 전우들이 성금을 모아 묘소를 손보고 기념비를 세운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묘비에는 ‘조선의 자유 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라고 적혀있었다.

  또한 그의 사후 홍범도 장군의 생가를 지나는 길을 ‘홍범도 거리’로 명명한 현지 당국의 관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홍 장군 서거 40주년이었던 1983년에는 고려인 조각가 최니꼴라이와 미술가 허블라지미르가 제작한 반신 청동상과 추모비를 세웠다.  

5.결론을 대신한 몇가지 제안 

고려인 차세대들의 민족 정체성 강화를 통한 통일의식 함양을 위해서는 이들의 기억속에 민족의 영웅에 대한 이미지를 남겨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민족은 스스로도 불행해지지만 국제사회에서도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결론을 대신해서 세가지 제안을 하면서 본고를 마치겠다.

첫째, 홍범도가 포함된 항일독립운동사, 민족해방운동사를 러시아로 번역해서 고려인 사회에 널리 알려지도록 해야 한다.  물론,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분단과 반공 논리를 뛰어 넘는 민족적 관점에서의 일관된 연구와 저술활동에 대한 정부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실정이지만 우선은 기존에 나와 있는 이 부분 연구 성과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고려인 사회에 효율적으로 전달, 학습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영웅을 배출했더라도 정작 후대들이 이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둘째는 위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고려인 동포학자들의 홍범도 연구에 대한 지원의 강화, 동포 언론을 통해 홍범도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에 대한 지원, 차세대 고려인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 중의 하나로 가칭 ‘홍범도 장학퀴즈’를 실시해서 어릴 때부터 홍범도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고려인들에게 지급되는 장학금도 가칭 ‘홍범도 장학금’으로 이름 붙여 그 액수나 수여 대상도 크게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는 AI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걸맞게 홍범도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비치된 통합 사이트의 구축과 함께 고려인 차세대들이 흥미를 가지고 잦은 접속을 유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민간영역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사이트 관리 정책이 필요하다.

요컨대, 고려인 사회가 최근 이루어진 홍범도장군의 유해봉환 과정을 지켜보면서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사실에 주목하고, 고려인사회가 홍범도 장군과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다양하고 지속적인 노력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통일을 향한 민족적 역량의 한 축인 재외동포, 그중에서도 고려인들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과 그 실제적인 역량이 크게 재고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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