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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 – 한글이라는 그릇의 크기

‘제24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 특집 방송을 앞두고

KBS 사회공헌방송부 부장 홍순영

  바슈토베의 삭풍은 방금 숫돌에서 벗어난 칼처럼 날카로웠다. 11월의 바람이 이렇게 매서운데 겨울 한 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은 제 몸 가눌 겨를이 있을까. 사위가 뻥 뚫려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피할 수 없는 이 모진 자연 현상의 출처는 어디인가. 시선은 지평선 바로 위에 울퉁불퉁하게 그려진 또 하나의 지평선, 톈산산맥의 만년설 앞으로 펼쳐진 갈대바다를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을 한참 바라보다 묵념하듯 고개를 숙이면 그나마 비스듬한 그곳 초입에 큼지막한 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별은 이미 녹슬어 빛바래 버렸고 녹슨 별을 떠받들고 있는 녹슨 묘비명 속 한글 이름은 방황하던 눈길을 잡아두었다.

  한글은 이미 세계적이다. 뉴욕 맨해튼 전광판 속에서, 유럽 축구 경기장 광고판 속에서, 전 세계 유명 관광지 안내서에서 우리는 한글을 목도目睹한다. 혹자는 한글을 ‘세상을 담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라고 했는데, 그 미적美的 우수성을 차치하고 한민족의 언어는 국경과 국적을 초월하는 커다란 크기의 위용을 자랑한다. 하지만 예상 밖이었다. 우슈토베Ushtobe 역驛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바슈토베 묘지에서 이토록 처연하게 녹슬어 있는 한글과 조우遭遇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애달픔이 차가운 바람에 뒤섞여 소리 없는 진혼鎭魂의 통곡이 되었다.

  바슈토베의 하늘과 바람, 그리고 동포들의 별을 찾아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던 11월 10일, 알마티 한국교육원에서 KBS 한민족방송 ‘제24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을 성황리에 마무리하였다. 시상식 준비를 시작한 5월이 남기고 간 서울의 봄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어느덧 카자흐스탄에 도착하였다. 고려인 동포들의 환대를 예고하듯 알마티에는 포근한 첫 눈이 내렸다.

  KBS 한민족방송은 CIS 지역, 사할린, 중국 등지에서 도착한 400여 편의 한글 체험수기 중 성인 부문과 청소년 부문 각각 대상 포함 10편, 총 20편을 엄선, 중앙아시아 항공 교통의 중심지로 이동하였다. KBS 한민족방송은 상패와 꽃다발을 건넸고, 비단길합창단, 고향합창단, 김겐나지, 문공자, 김세르게이, 주알마티 한국총영사관 박내천 총영사, 김로만 카자흐스탄 전前하원의원, 고려인협회 신유리 회장, 신안드레이 알마티 고려문화중앙회장, 독립유공자후손회 최따찌아나 회장, 알마티 한국교육원 김태환 원장 등 동포와 교민이 귀한 시간을 내주어 마련한 한민족 잔칫상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와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수상자들을 위한 시상식을 한 번 더 개최하였다. 여의도 KBS 본관으로 동포들을 초대하여 알마티의 여운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사할린과 중국 동포의 고견高見을 경청하였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동포 학생에게 한민족 동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학생들은 이제 막 빛을 내기 시작한 샛별처럼 반짝였다.

  ‘제24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 특집 방송은 12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KBS 한민족방송 주파수 AM 972kHz, 1170kHz, 단파 6015kHz를 통해 방송된다. 한국시간으로 오후 7시부터이다. 아날로그 방송 전파電波가 비록 톈산산맥을 넘지 못하더라도 KBS 디지털서비스, 라디오 전용 애플리케이션 ‘KONG’(콩)은 국경과 지형, 거리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 바슈토베에서 알마티 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삼성 스마트폰으로 KBS 한민족방송 프로그램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깨끗하게 들었다.

  한글이라는 그릇은 이미 충분히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크기가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동포 여러분의 정성 어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체험수기 한 편이 담길 때마다 그릇의 크기는 계속 커질 것이다. ‘KBS 한민족 체험수기’는 24년 동안 우리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겨울 지나 다시 봄이 오면 KBS 한민족방송은 새로운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을 준비할 예정이다. 모든 수상자들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시상식 성료盛了를 위해 물심양면物心兩面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KBS 사회공헌방송부 부장 홍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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