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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합뉴스) 김동찬 기자 = 한나래(126위·이하 복식 랭킹·부천시청)-장수정(107위·대구시청) 조가 국제테니스연맹(ITF) 비TV 여자오픈(총상금 4만 달러) 복식에서 준우승했다.   한나래-장수정 조는 4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대회 6일째 복식 결승에서 안나 다닐리나(26위·카자흐스탄)-이리나 시마노비치(167위·러시아) 조에 1-2(4-6 7-6<10-8> 7-10)로 졌다.   한나래-장수정 조는 2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매치 포인트 위기를 넘기고 승부를 3세트로 이어갔다.   매치 타이브레이크로 진행된 3세트에서 한나래-장수정 조는 초반 3-1로 앞섰지만 이후 연달아 5실점 하며 승기를 내줬다.   한나래와 장수정은 6일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ITF 비TV 여자오픈 2차 대회(총상금 6만 달러)에 나간다.

  (알마티=한인일보) 2월 1일 현재 카자흐스탄 인구는 1천978만8천254명이라고 바이게뉴스가 카자흐스탄 통계청의 최신 인구통계를 인용해 2일 보도했다.   이 중 도시인구는 1천222만7천458명이고 농촌인구는 756만796명이다.   965만8천685명의 남성과 1천12만9천569명의 여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 카자흐스탄 서부 망기스타우(인구 1천명당 27.75명), 투르키스탄(27.23명), 쉼켄트(26.34명) 지역에서 출생률이 가장 높았다.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주카자흐스탄 한국문화원은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와 현지에 주재하는 외교단을 초청해 한국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했다고 4일 밝혔다.   '2023 한-카자흐 상호 문화교류의 해'를 계기로 마련된 이 행사에는 카자흐 외교부 관계자와 국제기구 및 외교단 대사 내외 등 총 35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복을 입고 한국 전통 놀이와 연꽃 연등 만들기, 연꽃차 시음, 김밥 말기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문화를 체험했다.   이혜란 한국문화원장은 "최근 K-콘텐츠 열풍에 따라 카자흐 내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클래식과 순수예술 K-아트 등으로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며 "이런 현지 수요와 상황을 고려해 다양한 한국문화행사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almatykim67@yna.co.kr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사브가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약 두 달 만에 다시 만나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자흐스탄 대통령궁은 4일(현지시간) 토카예프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 지역에 있는 카자흐스탄 제2 도시 침켄트에서 마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궁에 따르면 양국 대통령은 비공식 회담에서 상호 신뢰와 우호, 선린의 정신으로 양국 간 동맹관계 강화를 위한 현재 상태와 전망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양국 정상은 또 지난해 12월 토카예프 대통령의 우즈벡 국빈방문 시 합의한 내용에 대한 이행 여부를 점검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양국 간 경제 협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산업·에너지·농업·운수·물류 분야의 상호 교역 확대와 투자 유치, 협력 발전 전망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두 정상은 우크라이나 사태 후 불안정해진 역내 지정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이에 앞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이었던 중앙아시아 5개국 외교장관과 일대일 회담을 한 후 우즈베키스탄도 방문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 순방에서 우크라이나가 흔들리면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 국가에서 러시아가 더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러시아의 서방 제재 회피를 돕지 말라고 촉구한 바 있다. almatykim67@yna.co.kr

  2022년 3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시작되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때 내려진 대러시아 경제 제재는 금융서비스와 주요 러시아 경제인, 관료, 정치인 등이 그 대상이었고 전략물자 수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러시아 내수 시장의 잠재력 덕분에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러시아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진 않았다.   이와 달리 2022년 3월의 대러시아 제재는 서방으로부터 러시아 사회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국제은행결제망 SWIFT에서 러시아 금융기관 대부분이 차단되었고, 러시아 물품의 수입 금지 및 러시아에서의 서방 기업의 경제활동 역시 중단됐다. 국제은행결제망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과 EU의 러시아 경제 제재는 2014년의 제재와는 달리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소련 붕괴로 이념에서 벗어난 러시아 사회를 상징하던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했고, 러시아인들이 사랑했던 애플의 상품과 온라인 서비스도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아디다스, 나이키, 이케아, 유니클로 등 서방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생필품, 유통망, 식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사라진 서방의 주요 상품 중 하나가 자동차다. 러시아의 부유층들이 즐겨 탔던 독일 자동차와 중산층에게 인기 있었던 기아와 현대 차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2018년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한국은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외곽에 15만평 규모의 생산 공장을 설립한 현대 자동차의 투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연간 20만대 이상을 생산하고 판매했던 기아와 현대 자동차는 2022년 경제 제재와 함께 러시아 시장에서 급속도로 사라졌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소비자들은 낯선 자동차 카탈로그를 살피고 있었다. 모든 서방 기업의 자동차 생산과 수입이 금지되었고 현재 러시아에는 중국 자동차만 수입되고 있다.   2023년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러시아 시장에 쏟아낸 자동차 상표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창안자동차(Changan), 체리(Chery, Exeed, OMODA, Jetour), 이치(FAW), 장화이(JAC) (DFM), 광저우자동차(GAC), 지리(Geely, Livan), 만리장성(Great Wall, Skywell, Tank, Haval), 홍치(Hongqi), 둥펑자동차(Voyah) 등 중국 자동차의 물결이라고 할 정도이다.   불과 2년 전인 2021년에 Haval, Chery, Geely, Changan 같은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에 판매한 차량은 총 8만 대가 되지 않았다. 같은 해 기아와 현대가 30만 대를 팔아 한국은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최대 판매국이었다. 2018년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의 점유율이 2%대였음을 고려하면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가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2022년 중국 자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3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한 것은 러시아 경제 제재 때문이었다.   중국 자동차 기업들은 독자 브랜드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뿐 아니라 러시아 자동차 기업에서 합작 형태로도 생산하기 때문에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는 1년 만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대로라면 2023년 중국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4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러시아 냉장고, 세탁기 시장에서 판매 대수와 판매량에서 1위는 LG였지만 2022년은 중국 하이얼이 1위를 차지했고, 2023년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산 생활 가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일본과 유럽의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떠났을 때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 경제 제재를 기회로 한국 기업들의 자리를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한번 잃은 시장을 되찾는 것은 새롭게 개척하기보다 더 어렵다.   중국이 해외 인터넷으로부터 자국민을 차단했다면, 러시아인들을 고립시킨 건 미국이었다. 서방 기업이 러시아에서 활동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정보통신 회사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내의 반전(反戰) 움직임이나 양심 있는 언론인들의 언로가 막혀 버렸다.   2023년 현재 러시아 경제는 어떠한 혼란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상점의 매대에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생산된 소비재, 공산품이 부족함 없이 진열되어 있다. 러시아인들은 애플과 맥도날드, 기아-현대와 LG, 삼성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려 했던 미국의 전략은 실패했고, 오히려 경제 제재의 대가는 기업이 치르고 있다. 그 어느 국가보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이 경제 제재로 얻는 가치와 이익은 무엇일까?   1853년 크림전쟁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1904년 2월 러일전쟁까지 이어졌고 이 세계적 대립 속에서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새로운 냉전의 장막 앞에서 다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해마다 3월 초가 되면 카자흐스탄의 꽃가게들은 대목을 맞이한다.  ‘세계여성의 날(3월8일)’을 맞아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과 직장 동료들에게 선물할 꽃을 사기 위한 남성 손님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공휴일인 8일보다 하루 전날에 여성 동료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부서마다 작은 파티를 열어 여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가정에서는 남성들이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다. 20세기 초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에서 유래되어 1975년 UN이 3월 8일을 공식적으로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구소련국가들에서는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데 봄맞이 축제의 성격도 겸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축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시작되어 1945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딱히 명분이 없어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제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이 공개적으로 기념되지 못했다. 역대 정권이 이 날을 사회주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으로 여겼고 또한 여성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행사를 치룰 수 있게 되었고 2018년에 비로소 '여성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여성의 인권과 권리에 대해 얼마나 둔감한 가부장적인 사회였는지를 반증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평등이 실현되었고 특히나 한 자녀를 둔 가정의 증가로 인해 아들 딸 구분없이 모두 다 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차별과 혐오가 있고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해 공적영역에서 전면적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전환이 아쉽다. 펠르랭과 김 알렉산드라 빼뜨로브나 2012년 프랑스에서 장관이 된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펠르랭. 한국 이름은 김종숙이며, 태어난지 3~4일만에 서울의 길거리에 버려졌다가 고아원에 들어갔고 생후 6개월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2012년 중소기업·디지털경제 담당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후 통상국무장관을 거쳐 ‘문화대국 프랑스’의 문화 행정을 책임지는 문화부장관 등 3년 반 동안 3개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퇴임 후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기사)장을 경제 부문에서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신문과 방송은  "한국인이 프랑스 장관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그녀가 성장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자신을 외국으로 입양보낸 나라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그녀의 ‘화려한 성공’과 ‘위대한 한국인’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그녀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랑스인이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 뿐'이라고 분명히 선을 긋었다. 사실, 펠르랭보다 먼저 외국에서 여성장관이 된 재외동포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한세기나 앞서서… 그녀의 이름은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그녀의 이름은  <소련 공산당 역사> 제2권에 10월혁명과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아르만드, 아르쮸히나 등의 여성 혁명가들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고,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 백과사전에도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선역사> 제2권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는 1885년에 니꼴쓰크 - 우수리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금지된 마르크스작품을 탐독했다.  1914~1917년 수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우랄의 사업장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탁월한 혁명가이자 국제주의자였으며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랬던 첫 한인 여성공산당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공식 자료는 이게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김 마뜨웨이 찌모페이비치가 쓴 <원동에서 소비에트주권을 위한 투쟁에서의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1918~1922)>이란 책에 그녀에 대해 그나마 조금 기록되어 있지만 김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크즐오르다 사범대학 교원 우 블라지미르는 최대한 문헌자료, 친척들 그리고 혁명가와 함께 투쟁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회상기 등에 기초하여 그녀의 삶을 재현한 후 고려일보에 기고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의 시넬니코보 한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중철도 건설장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조서인 철도건설 노동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만인산》과 《왕정산》이라는 비단으로 만든 우산을 선물했다고 한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블라디보스톡의 오빠에게 온 16세의 김 알렉산드라는 독서에 탐닉하며 열정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검은 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그녀는 러시아의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게르첸이나 체르느이쉐프스키 등의 사상서적들을 탐독하며 미래의 혁명가를 꿈꾸었다. 노동자의 통역가에서 대변자로 결혼과 출산, 자녀양육을 하며 블라디보스톡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가던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혁명 직전,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수천명 규모로 모집했던 우랄지방의 나제쥔스키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체불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속에서 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민족 차별까지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유창한 러시아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노동자들의 입이 돼 주었고, 그들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면서 서서히 이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된다. 이를 기초로 그녀는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김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최초의 한인여성 사회민주노동당원(볼셰비키)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라는 제1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대표자회의(1917년 9월)에 참가하는 등 곧바로 당 및 소비에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12월 김알렉산드르는 크라스노쉐코프가 지휘하는 극동소비에트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르는 3월에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과 주축이 되어 한인사회당과 적위군을 조직했다.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에 능통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그 혁명적 지도력을 인정받아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1차대전 포로문제와 관련한 혁명사업들, 조선인, 중국인, 헝가리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주의부대 편성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편 1918년 8월말 극동지역의 내전상황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소비에트 볼셰비키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정권을 붕괴시킬려는 미,영,독,프 등 서구 열강과 함께 일본은 외국간섭군으로는 가장 대규모인 7만명의 육군을 연해주에 파견했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홍범도 부대 등의 항일독립군부대를 이 기회에 소탕하겠다는 목표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1918년 8월 25일-28일기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제5차 극동지역 노동자대회에서 일시 전선을 포기하고, 한인 혁명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1918년 9월 2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일단의 한인혁명가들은 백위파 군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죽음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 김 알렉산드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어 ‘죽음의 객차’에 감금되었다. 칼믜코프의 백위파군들에 의해 그녀는 엄청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혁명열사로서의 기백을 보였다.   9월 14일 새벽 4시. 백위파 군인들은 ‘죽음의 객차’에서 눈을 가린 채 김 알렉산드라와 사회노동위원 티쉰, 하바로프스크시 재판소장 네페도프를 끌어냈다. 티쉰과 네페도프는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 알렉산드라를 양쪽에서 부추기고 수많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총살당한 일명 ‘죽음의 골짜기’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 던지며 외쳤다. “(너희들은)  내가 여자이고 둘째로 내가 조선 여자이니까 끝까지 이겨내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숨을 바치며 지킬려는 신념은 로씨야에서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총살 직전 마지막 소원을 묻는 질문에 “여덟 발자국만 걷게 해 다오” 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왜 하필 여덟발자국이냐”라고 되묻자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스포츠 강국 카자흐스탄은 동계종목에서도 넓은 저변과 함께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강국들 중 하나이다.  침불락이라는 천혜의 스키장은 설상 종목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알마티 인근의 악불락은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 등의 경기를 하기에 역시 천혜를 조건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알마티에만 해도 '발루얀샬락'과 '알마티 아레나', '할릭 아레나'등 국제규격을 갖춘 실내 빙상경기장들이 있고 수도 아스타나에서도 국제빙상경기장이 있어서 국제대회가 자주 개최되곤 한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감동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그 직전까지 극에 달했던 남북, 북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적으로 평화모드로 바꾼 역사적인 대회로 기록됨과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올림픽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창올림픽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고려인들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비핵화를 위한 일련의 회담과 조치들이 숨가쁘게 벌어지는 것을 희망찬 눈으로 지켜보면서 머지 않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 찍고 평양 나들이를 할 수 있을 기대감에 벅차 있었다. 그래서 평창동계올림픽 경기들을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지켜보았고, 최민정, 김아랑, 김예진, 심석희, 이유빈, 이승훈 등의 금메달을 목에 걸 때마다 마치 자신이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인 양 기뻐했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메달을 딸 수 있는지 의아해 하기 까지 했다.   우리나라가 동계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 덕분었다. 서양선수들보다 체격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쇼트트랙,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흔히, 선수들은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내린다'고 말한다. 평소의 실력 못지않게 대회 당일의 심리적 안정감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시간과 노력, 재능, 투자 등 수많은 요소가 어우러져야지만 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경우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등이 주인공들이었고 이들은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민들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겼다. 남조선 스뽀르트 선수 배기태 <사진설명 :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그럼, 이런 결실을 맺게 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는 70년대의 간판스타 이영하로 부터 시작되어 80년대 중반부터는 배기태라는 선수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배기태는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1987년 월드컵 3차대회 500m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서 198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메데우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소련은 적성국가로써 교류가 없었을 뿐더러 모스크바도 아니고 알마아따(현재의 알마티)에서 열리는 대회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바로 이 대회에서 배기태 선수가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7년 알마티에서 열렸던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국의 빙상국가대표팀 감독은 “제가 배기태 선수에 이어 그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어요”라면서 “그때 우리 선수들은 소련에서 대회가 열린다고만 알고 비행기를 탔는데, 몇 번 갈아타기를 거듭해서 도착한 경기장이 바로 이 메데오 경기장이었습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직항노선으로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수십시간을 돌아서 왔었죠”고 당시를 회상해주었다.         한편, 고려일보는 1988년 3월 8일자 4면에 '경기는 치열했다'는 제하의 기사로써  당시의 경기를 보도하고 있다.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 쓰뽀르트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특히, 시상식에서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는 배기태 선수의 사진과 함께 <500메뜨르경주에서 남조선 선수 배기태가 승리하였다>고 사진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일보의 김훈 기자는 1988년 3월 5~6일  알마티의 메데오 경기장에서는 세계남자스피드스케이드선수권대회가 진행되었다면서 메데오 경기장에 선수와 진행요원, 관중 등 1만 2천명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고려일보에 따르면, 경기장의 중앙관람석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게.웨.꼴빈을 비롯한 당, 쏘베트, 직업동맹, 공청동맹 기관 책임일군들이 있었다. 경기개막식에서 선수권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알마티시집행위원회 위원장 세.까.누르까질로브 그리고 국제빙상스포츠연맹을 대표하여 이.뻬루크(이태리)가 축사를 하였다. 제82차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자들의 다수는 금년 동계올림픽에서 참가한 선수들이였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진행된 이틀간의 날씨는 아주 따뜻하였다. 때문에 경기장의 얼음판을 리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 여러 나라 국기들이 휘날렸고 수많은 외국손님들이 특별히 눈에 띄우게 만든 가지각색의 플랭카드, 맑고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봄 태양,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의 함성 등은 경기장을 흥겨운 명절분위기로 휩싸게 하였다. 500메터 경주가 시작되었다.  제12번째로 출전한 세계기록소유자이며 남조선스포츠선수인 배기태가 3689초간에 이 거리를 돌파하여 첫자리에 나서 금메달을 쟁취하였다. 둘째 자리를 에. 플레임(미국), 셋째 자리를 띠 아오야나기(일본)이 차지하였다.   본사기자   김훈         배기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500m 우승을 차지하고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챔피언에 오르는 등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나, 근소한 차이로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은퇴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28일(현지시간) 안보, 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는 데 합의했다고 타스·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날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서 열린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우리는 안보와 에너지, 무역, 투자 등과 같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많은 분야에서 오랜 기간 신뢰할만한 파트너십을 구축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킬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의 독립과 영토 보전, 주권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이고 확고한 지원에 감사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또 미국이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5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에도 환영 의사를 밝혔다.   이에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미국과 카자흐스탄의 관계는 굳건하며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우리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회담에 이어 중앙아시아 5개국(C5) 외교장관들과도 만난 뒤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과 미국은 2015년부터 매년 'C5+1' 형식의 외교 회담을 열고 지역 경제와 환경, 안보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다.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2년 차에 접어든 시점에서 이뤄진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이번 카자흐스탄 방문은 러시아와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미국 등 서방 입장에 더 가깝게 끌어들이려는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옛 소련권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경우 러시아와 경제·군사 등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카자흐스탄은 친러시아 세력이 세운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헤르손주 등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 대해 러시아가 주장하는 합병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카자흐스탄은 러시아를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 채택을 위한 투표에서는 기권 또는 반대 입장을 보여왔다.   또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종식을 위해 정치적 해법을 촉구한 중국의 주장에 대해 서방과 달리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한편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카자흐스탄 방문이 이뤄진 이 날 러시아도 맞대응 차원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외교 정책의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이번 방문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냐는 질문에 "우리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양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우리만의 협력 플랫폼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비단길 합창단원들이 남자의 날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알마티=한인일보) 최재형 기자 =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산하 '장교클럽'(회장 : 서게르만)은 지난 23일 ‘남성의 날’을 맞아 알마티에 거주하는 고려인원로, 퇴역군인, 아프카니스탄 참전군인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면서 춤과 노래가 곁들여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신유리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장, 신안드레이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장, 황마이 소련공훈체육인, 강게오르기교수 등 동포사회 원로들과 퇴역군인이 참석했다.   ‘비단길’합창단의 노래, 김겐나지 공훈예술가의 기타 연주가 곁들어진 이날 행사는 ‘장교클럽’과 동포사회의 대표적인 합창단인 ’비단길’합창단이 주축이 되어 준비하였다.   일부 참가자들은 가슴에 훈장을 달고 나왔는가 하면 구소련시절의 군복을 입고 나온 참전노병도 있었다. 이들은 음악이 흘러나오자 왈츠를 추면서 청년장교시절 당시로 돌아가는 듯 했다.   ‘비단길’합창단원이면서 행사 사회를 본 김 스베틀라나씨는 “오늘은 남성들을 위한 날인데, 특히 참전노병들과 현역 군인들이야 말로 오늘의 주인공이다”고 말했다.   또 “‘남성의 날’은 구소련 군대의 전신인 ‘붉은 군대’가 만들어진 1922년 2월 23일을 기념하여 만들졌고, 곧 다가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과 함께 구소련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큰 국경일 중의 하나이다.”고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한편,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남성의 날’을 5월 7로 옮겨서 기념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2월 23일을 ‘군인의 날’ 또는 ‘남성의 날’로 부르며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축하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구소련시절 군장성 또는 군 간부를 역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장교클럽'이라는 단체가 있고, 매년 '남성의 날'을 기념해오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러시아 송유관 운영사인 트랜스네프트가 독일에 카자흐스탄산 원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고 27일(현지시간) 타스·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트랜스네프트는 이날 오후 3시 폴란드를 경유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해 카자흐스탄산 원유 첫 공급분인 2만t을 독일로 보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운영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은 벨라루스를 지나 폴란드, 독일,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으로 이어지는 육상 수송로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카자흐스탄산 원유 1차분은 지난 1월 말 이 송유관을 통해 독일로 공급될 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 미뤄졌다.   카자흐스탄 측은 지연 이유에 대해 "기술적인 문제는 없으며 공급자와 구매자 간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제재 가운데 하나로 올해부터 송유관을 통한 러시아산 원유 수입도 중단하고 대체 물량 확보를 위해 카자흐스탄과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카자흐스탄 국영 송유관 회사인 카즈트랜스오일은 작년 12월 러시아 트랜스네프트에 올 한 해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해 원유 120만t을 보낼 수 있도록 신청했다.   독일은 해당 송유관으로 카자흐스탄산 원유를 수입하면 러시아산 원유 공급에 의존해온 슈베트 PCK 정유공장 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su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