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화 – 토미리스, 전쟁의 여신(2019)
대제국 페르시아 물리친 ‘카자흐스탄의 여전사’
감독: 아칸 사타예브
출연진: 알미라 투르신, 가산 마수드, 베리크 아이차노프, 아딜 아크메토프
“모든 초강대국들에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종교적·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제국의 미래』 중, 에이미 추아 지음, 비아북 펴냄)
관용의 제국 페르시아 창건자 ‘키루스’
인류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는 키루스라는 비범한 군주와 함께 역사에 갑자기 등장했다. 페르시아는 고대 이란계 부족이자 남서부 지역 이름인 ‘파르스’에서 유래했다. 이곳 출신인 키루스가 아케메네스 왕조를 새로 시작하면서 파르스 사람들이 주도 세력이 됐고, 그리스에 전파되면서 페르시아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 그럼 그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종교·이념·인종·역사가 다른 나라를 어떻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할 수 있었을까.
외할아버지가 통치하던 메디아 왕국을 정복한 키루스는 기원전 549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강국인 리디아 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리디아인은 금과 은의 생산자로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에게해 사이 교역의 중개인으로서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리디아 왕은 크로이소스. 그는 세계 최초로 금·은 주화를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얼마나 부자였던지 “크로이소스처럼 부유하다”라는 표현이 지금도 영어권에 남아 있을 정도다.
새로 등장한 이웃을 불신한 크로이소스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에 대한 예방 전쟁에 나섰다.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크로이소스는 즉각 공격해야 할지를 그리스 델파이에 신탁을 요청했다. 신탁은 만일 그가 할리스 강을 건너면 ‘큰 왕국’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답했다. 기뻐한 크로이소스는 공격했다. 하지만 그가 멸망시킨 것은 자신의 왕국이었다. 키루스는 역공에 나서 크로이소스 군대를 격파하고 리디아를 병합했다. 결론적으로 신탁이 알려준 큰 왕국은 리디아였던 것. 키루스는 이어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어찌나 전격적이었던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고 바빌론을 점령했다.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키루스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 전략을 썼다. 그러나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게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그 대신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웠다.
하지만 키루스는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고유의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그는 피정복민의 사원, 종교의식, 그리고 신들을 놀라우리만큼 존중했다. 그는 개방과 절제의 표상이었다. 적에 관대했고, 법을 중시했다. 다민족을 포용하고 상호 공존하는 보편제국의 길을 열었다.
이 때문에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키루스는 군주로서 칭송이 자자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훈)』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저작을 남겼다. 하지만 키루스도 죽음 앞에선 허망했다. 그의 참수 전략은 전쟁의 여신 ‘토미리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이 진짜 참수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 호령한 여왕 ‘토미리스’
영화 ‘토미리스, 전쟁의 여신’(2019)은 바로 키루스가 최후를 맞는 마사게타이와의 전투를 그린다. 마사게타이는 스키타이의 일족으로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북동쪽 스텝 지대에 살았던 고대 유목민 연합체. 키루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좀 다르다. 영화는 헤로도토스가 남긴 『역사』를 토대로 만들었다.
기원전 6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 마사게타이 부족 내 반란으로 족장 스파르갑이 죽고, 살아남은 딸 토미리스(알미라 투르신)는 복수를 다짐하며 고향을 떠난다. 훗날 뛰어난 전사로 성장한 토미리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어느 날,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초원지대를 넘보기 시작하고, 토미리스의 아들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
헤로도토스가 들려주는 전설에 따르면 키루스와 그의 병사들은 마사게타이 영토에 포도주를 일부러 많이 남겨놓은 야영지를 함정으로 두고 자리를 피했다. 토미리스의 아들이 이끌던 마사게타이 군대가 이를 발견했는데, 술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효과를 아직 모르던 이들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포도주를 마셨다. 후에 페르시아인들이 쓰러져 있는 군대를 공격해 토미리스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다.
여왕은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내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라고 외쳤으나 키루스는 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왕자는 자살한다. 분노에 찬 토미리스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가산 마수드)과 광활한 초원에서 맞서 싸우게 되는데….
카자흐스탄의 영웅 토미리스가 이끄는 유목 전사들과 당시 세계 최강 페르시아군이 벌이는 대규모 전투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쐐기문자로 쓴 인류 최초 인권선언 ‘키루스 실린더’
수천 년 동안 키루스를 영웅으로 칭송받게 만든 것은 제국의 넓은 정복지 때문이 아니다. 1879년 이라크 바빌론 고대 신전 벽에서 발견된 길이 23㎝, 지름 10㎝ 원통. 이른바 ‘키루스 실린더’로 불리는 진흙 토기 속에 숨겨진 그의 통치 철학 때문이다.
키루스 실린더에는 기원전 539년 키루스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내린 포고령이 담겼다. 쐐기문자로 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키루스는 자신이 페르시아·메디아·리디아·바빌로니아 4개국의 왕, 즉 왕 중의 왕임을 선언한다. 바빌론을 재건하는 정책을 펼 것을 다짐하며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용한다. 또 모든 형태의 노예제와 강제노동을 없앤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할 것이다. 나는 결코 전쟁(강압)으로 통치하지 않을 것이다.” 키루스는 관용과 신앙의 자유를 약속했다.
이 때문에 키루스 실린더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 평화선언, 종교의 자유선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듯 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정부 형태와 통치 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조차 차용하는 유연성을 보이며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냈다. 키루스의 통치 철학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영향을 줬고,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본 철학으로도 작용했다.
키루스 실린더는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세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요즘 현재적 의미를 더한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이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