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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블라지미르 노인의 굴곡 많은 삶

  크슬오르다 농업전문학교를 최우등 성적으로 필한 김 블라지미르는 찌미랴세브 명칭 농업아카데미야에 입학하기 위해 1952년 초가을에 모스크바에 왔다. 중앙건물에 자리잡은 접대실에서는 11시에 면담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월로자에게는 거의 두시간 여유시간이 있었다. 그는 면담을 앞두고 긴장감도 풀고 흥분도 가라앉힐겸 아카데미야 건물앞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기에는 소련의 여러 곳에서 온 신입생들이 면담을 기다하고 있었다. 그들중에는 최우등생, 메달을 받은 졸업생들도 적지 않았다.

  정각 11시에 블라지미르는 차례를 기다렸다 그의 성명을 복부르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면담실로 들어갔다….장령북을 입은 심사위원을 엄숙해 보이는 위원 몇몇이 앚아있었다. 와실리 와실리예비치 윌리얌스가 심사위원회 위원장이였는데 그는 농업과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윌리얌스는 아카데미야 토양학 및 농업화학 강좌장이였다.

– 농업전문 학교를 필하고 어디에서 실습을 했지? – 와실리 와실리예비치가 월로자에게 물어보았다.

– 저명한 김만삼 회장의 <기간트>꼴호스에서 실습을 했습니다 – 월로자는 긍지감을 품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벼재배 분야에서 해마다 기록을 세우며 고려인으로서는  사회주의 로력영웅의 칭호를 맨 먼져 받은 김만삼을 소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질문은 스포츠에 대한 것이였다. 월로자는 권투를 했으며 시 및 주 권투경기에도 여러번 참가하였다.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다. 이것도 긍정점이였다. 더군다나 윌리얌스 박사도 스포츠 애호가였다.

  농업아카데미야에 합격된 김 블라지미르에게 기숙사에 자리를  주었다. 그는 뚜와에서 온 옌사크 하얀과 한 방에서 살았다. 월로자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먹장같은 검은 구름이 월로자의 머리우에 이미 드리워 있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지 거의 두 달이 되던 어느날 그를 대학 관리인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불안한 감을 안고 사무실 문턱을  넘어섰다. 월로자는 관리인이 할 이야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었다. 월로자 자신도 이 문제가 항상 근심스러웠지만 강제이주 후 이미 5년이 지났는데 무사히 너머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우선 모스크바에 거주등록이 아직도 되지 않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의 이동이 제한되어 있는데 왜 규칙을 위반하면서 모스크바에 왔느냐고? 하여튼 제 6부서 국장을 찾아가서 거주등록을 부탁해봐, 만일 국장이 허가하지 않는다면 집으로 되돌아가는수밖에 없어 – 관리인이 말을 끝냈다.

  이 말을 들은 월로자는 서 있는 땅이 꺼지는것 같았다. 아카데미야에 입학하려고 그 먼길을 와서 입학까지 했는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억울하기가 끝이 없었다. 국장이 허가하지 않을 확율이 높았다. 그래도 그 기관을 찾아가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또 다른 문제가 나섰다. 차표를 구매할 돈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물론 되돌아 가게 된 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도 잘 알기 때문이였다. 월로자는 사웰롭스끼 역에서 집을 부리면서 차비를 벌었다. 그래서 차표를 사러 역에 갔는데 철도종업원의 옷차림을 한 사람이 월로자와 말을 걸면서 어디로 가는가고 물어보았다. 월로자의 입에서 크슬오르다라는 말이 떨어지기도전에 그 사람은  크슬오르다에 출장을 갔었는데  월로자가 산다는 그 거리의 한 집에서 며칠 지냈다고 이야기 하면서 마치도 한 고향 사람을 만난듯이 반가워 하였다. 어리석은 월로자는 그 때 왜 그 사람이 자기에게 그렇게 바싹 다가오는가를 몰랐다. 월로자는 표를 사 줄 수 있다는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돈을 주었다.  그 시기는 차표를 사기가 아주 힘들었던 때였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기를 당한 월로자는 기숙사에 와서 그 사연을 이야기 했다. 옌사크를 비롯한 동창생들이 돈을 거두어 월로자에게 주었다. 월로자는 일생을 두고 그들에게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럭저럭 나날을 보내다 보니 11월 혁명 명절이 며칠 남지 았다. 월로자는 붉은광장에 가서 열병식에 나오는  스탈린과 기타 당 지도자들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을 질질 끌어 11월 명절날까지 모스크바에 있었다. 약빠른 월로자는 시위행진 참가자들의 대열에 끼여들어가  레닌릉묘 앞을 지나가면서 스탈린, 워로실로브 기타 당 및  지도자들을 직접 보았다…

  김 블라지미르 보리소비치는 원동변강 연해주의 뿌찔롭까 촌에서 탄생하였다. 부모의 강요로 16세에 결혼한 그의 아버지 김학진은 월로자가 두살 되던 해에 집을 떠났다.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고멜 시로 간다고 했는데 그후 한동안 무소식이였다.  살아나가기 힘들어 어머니가 재혼을 하자 그당시 18세였던 삼촌 김학인이 와서 조카 월로자를 데리고 갔다.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되였던 해에 여섯살이였으니 김 블라지미르 노인은 강제이주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차에 실렸을 때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보였고 차를 타고 지루하게 오래 가던 일이 기억에 약간 남았다… 

  월로자는 삼촌,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웃을 하고 살던 딸 셋을 거느린 할머니 ( 후에 이 할머니 맏딸의 남편이 크슬오다 고려극장에서 의상전문가로 일했다)  기타 고려인들과 함께 크슬오다 시로 실려왔다. 강제이주왔던 첫 해 겨울에 고려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다한 고생을 했다. 토굴이나 다름없는 반지하실 집의 벽은 겨울이면 새하얗게 서리가 덮여 집안은 몹씨 추워 잠이 들 수가 없었고 쥐들이  많아 보잘것 없는 음식조차 방안의 들보에 달아매여 놓아야 했다. 고려인들 뿐만 아니라 강제이주당한 모든 소수민족의 운명이 다 그랬었다.

…한번은 월로자가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앞에서 걷던 깝까스족 노인이 길가에서 무엇을 뜯어서는 흙을 털고 즉시 입에 넣었다. 월로자가 가까이 가 보니 그 풀이 명아주 ( 러시아명 레베다 )였다.

  블라지미는 중학을 필한 후에 크슬오르다 농업전문 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을 떠났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끝내 다시 살지 않고 제각기 다른 남편, 다른 안해와 살림살이를 꾸몄다. 월로자가 어머니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던 어느 날 지방 치료소 소장 올리가 일이니츠나가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은가고 물어 보면서 누구를 찾아가 어머니의 거처를 알아보라고 하였다. 그 때는 월로자가 모스크바에서 크슬오르다에 돌아와 알마아타 농업대학 3학년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월로자는 어머니의 주소를 받아 침켄트 주 빠흐따아랄 구역 슬라뱐까 촌을 찾아갔다. 20여년이 지난 후의 만남이였다.

– 20여년이 지났는데 나를 인차 알아볼 수 있었는가요 – 하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가 말했다:

– 나는 너를 언제든지 알아볼 수 있어, 네 몸의 흉터를 보고 말이야…네가 4살 때 난로우에 있던 주전자를 내리려다가 끓는 물을 몸에 덮어썼지, 그래서 흉터가 몸에 남았거던…

  어머니와 만남이 있은후 몇달이 지나 월로자는 알마아타 사범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던  김 마리야를 만났다. 겸손한 아가씨는 월로자의 마음에 들었고 마리야에게도  름름한 총각이 마음에 들었다. 몇달 후에 월로자는 마리야와 결혼을 하였다. 겸손한 대학생 결혼식이였다. 그 때 어머니가 1000루블리를 보내왔다. 아버지 역시 600루블리를 보냈다. 아버지는 홍 류보위와 재혼하여 크슬오르다에서 살고 있었다. 류보위 빠블로브나는 그당시 크슬오르다에서 발간되던 <레닌기치>신문사에서 근 20년을 교정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니 곧 100주년을 기념하게 될 신문 발간에 그 역시 적지 않는 기여를 했다. 블라지미르는 그를 친아들이나 다름없이 보살피어 준 홍 류보위 빠블로브나의 온정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1952년 가을에 모스크바에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 온 블라지미르는 다음해에 알마아타 농업대학에 입학하였다. 농업대학을 필한 그는 <세메노워드>솝호스에 파견되어 농산기사로 일했다. 다음 6년동안 농업탐험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들은 카자흐스탄의 여러 지역에 출장을 다니면서 토양의 성분, 륜작제, 잡종작물 재배의 가능성을 연구하였다. 블라지미르 보리소비치는 그 시기에 구리예브 주와 까라간다 주를 제외하고는 카자흐스탄의 모든 주를 다 다녔다고 한다.

블라지미르 보리소비치는 부인과 함께 딸 둘을 키워 고등지식을 소유하도록 뒤받침하여 주었다.  맏딸 나딸리야는 사범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작은 딸 왈렌찌나는 물라학을 전공했다.

  김 블라지미르 보리소비치는 전련맹인민경제성과 전람회 메달을 두 번 받았고 <로동특공>메달, 소련 수메성 영예표창장도 여러번 받았다.

  90고개를 넘어 선 블라지미르 보리소비치는 나라의 농업발전에  한 기여에 대해 긍지감을 품고 있으며 자식들의 보살핌과 아홉명의 손군들의 웃음속에서 노년을 편안히 보내면서 그들이 자신이 겪었던 강제이주의 쓰라린 비극을 절대 겪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남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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