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홍범도 3]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뒷이야기
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논란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홍범도장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논란이 격화될 수록 소설 ‘범도’가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대중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본지에서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항일독립운동 업적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특히나 쓸쓸한 노년을 맞았다는 식의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그의 카자흐스탄 생활에 대한 글을 기획했다.
<편집자 주>
김상욱
본지 주필
홍범도 장군은 2021년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돌아간 지 2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미 1962년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지만, 이때 1급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당시의 상황을 가능한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홍장군의 유해봉환의 뒷이야기를 풀어봄으로써 다시 한번 홍장군의 진면모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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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잠든 곳은 원래 어디였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라는 곳입니다. 카자흐스탄의 서부지역, 그러니까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내려서 만들어진 시르다리아 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수량이 연평균 300미리가 안되는 반사막 지역인데요,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이러한 척박한 땅에 시르다리야 강물을 끌어들여 중앙아시아 최대의 벼농사지역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황무지가 옥토로 바뀐 곳이죠. 그 중심에는 고려인이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시르다리야 강을 따라서 고려인들이 만들어 놓은 ‘선봉’, ‘제3인터내셔널’ 등 대규모 농장들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이곳은 벼가 누렇게 익어서 일렁이는 황금물결을 끝없이 볼 수 있습니다. 크즐오르다 시내에는 이런 역사를 간직한 도시 상징탑이 있는데요, 꼭대기에는 벼 이삭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올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동사범대학, 고려극장, 고려일보 등 교육문화단체들이 이주되었던 도시답게 고려인들의 정신적 수도였습니다.
ㅇ.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장군의 묘비문에는 어떤 글이 쓰여있나?
“홍범도 장군의 묘역은 ‘통일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서 있고 그 아래 홍범도 장군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 주변엔 3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1937년 강제이주, 1995년 광복 50주년, 1997년 강제이주 60주년에 맞춰 고려인들의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흉상이 세워지기 전 당시 묘비에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10월 25일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ㅇ. 홍범도 장군은 어떤 분?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실 부모했기 때문에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다가 조선군대에 입대하여 직업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관의 부당한 명령과 형편없는 처우에 분개, 군을 나와 함경도 일대에서 포수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는 포수들의 생계수단인 총을 강제회수하려 하자 홍범도 일행은 이를 거부하고 의병을 조직해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이렇게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대항하던 홍범도는 1920년 간도 국민회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 후 청산리 전투에서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했죠.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항일독립전쟁사로 바꾸어 불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력양성론, 외교론 등의 방법을 주장하셨던 분들도 있었지만 당시 다수는 무장투쟁론이었고 그 중심에 홍범도 장군이 계셨습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서당이나 서구식 학교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금강산 신계사에 잠시 머물던 시절, 글을 배우고 사명대사와 이순신장군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서민적이고 소탈한 그는 민주적 리더쉽을 체현하였고 시대의 큰 흐름을 잘 읽어내셨고 매 시기 정세판단에도 탁월하여 동포지도자로 추앙받았습니다. (일부 관념적인 독립운동가들과 대비 되는 대목)”
ㅇ. 어떻게 해서 카자흐스탄까지 가셨나?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는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독립군의 존재는 눈에 가시였습니다. 특히 1920년대 전반기, 독립군들에게 기습공격을 당해 큰 타격을 입었던 일제는 만주의 조선인마을을 습격하여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자 홍범도장군은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동해 전력을 키우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상황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앞서 일제는 러시아 혁명기를 틈타 블라디보스톡을 통해 7만명의 육군을 파견해서 연해주를 침략하는데요, 이때 일본군의 전술 목표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해서 독립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연해주에 살던 동포들과 독립군들은 러시아 짜르의 잔존세력인 백군과 한패가 되어 연해주를 유린하는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 곧 조선의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소련의 적군(붉은 군대)와 함께 싸우게 됩니다.
조선인 항일독립군 또는 조선인 항일 빠르티잔 이라고 불리는 많은 부대가 생겨서 1924년 드디어 일제를 몰아내게 되고 홍범도 장군도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 홍범도 장군은 레닌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레닌과 단독회담을 갖고 조선의 독립 방안을 의논합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은 레닌으로 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받게 됩니다. 그러나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논리는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바로 일제가 연해주에서 철군하면서 내세운 조건들 중에 하나로써 항일독립군들을 해산시켜라 고 요구하고 혁명을 통해 갓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군대의 조속한 철수를 위해 이 요구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연해주지역의 많은 독립군 부대는 총을 내려놓고 대신 삽과 곡갱이를 들고 둔전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내일을 대비해 나갑니다. 그러던 중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가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만주와 연해주 침략전쟁을 노골화하자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일제와의 충돌의 피하기 위해 국경지대에 주로 모여 살던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를 시킵니다. 이때 홍 장군도 포함되었습니다.”
ㅇ. 카작에서는 말년에 힘들게 사셨다고?
“먼저 이 부분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동포사회 자체가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이들이 없다는 측면에서 이 질문은 맞는 말이구요. 당시 69세였던 그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오시게 되는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크즐오르다로 선봉 신문사, 원동사범대학, 고려극장 등이 이전해 옵니다. 동포사회의 교육, 문화기관 들 중에서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의 경비 책임자 격인 수위장으로 노년을 보내시게 되는데요, 젊은이들 못지 않게 동포사회의 대소사를 챙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날으는 홍범도’를 고려극장 후배들이 무대에 올리자 이를 약간 쑥스러워 하며 관람하셨죠. 전장에서 쓰러져간 동료 독립군들에 비해 살아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을 볼 수 있게 되니까 그런 맘이 드시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ㅇ.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모국에 오기까지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있었던 거로 아는데, 유해봉환이 늦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없어서 이구요, 여기에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아픔이 더해져서 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5년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시작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홍 장군의 자손이 전부 명을 달리해 손이 끊어졌거든요. 아시다시피, 부인과 큰 아들은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고 둘째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유해 봉환을 하는 데 있어 후손들의 입장이 굉장히 중요한데, 추진할 사람이나 후손들이 없었기 때문에 추진이 잘 안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 홍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다. 그래서 북한에 더 연고권이 있다고 해서 북은 북으로의 봉환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 방문해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다가 비로소 2021년 8·15 때 모시게 되었습니다.”
ㅇ. 어떤 과정을 거쳐서 모국에 모시게 됐나?
“독립영웅을 고국에 모시는 것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번에 유해봉환이 잘 마무리된 것은 문재인대통령의 끈기와 진심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2019년 방카 당시 토카예프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의제로 이 문제를 올리게 했구요. 그 후에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카자흐스탄으로 보내 친서를 전달해서 이 문제에 대한 큰 관심을 전달했던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자흐정부와 고려인동포사회는 감동하게 되었구요 그동안 추진이 잘 되었던 이 일에 동의와 협조가 이루어졌습니다.”
ㅇ. 홍장군의 고향이 이북이다 보니 북한에서도 모시고 싶어 했을 텐데?
“사실 북측이 평양으로 봉환해야 한다고 카자흐측에 요청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그동안 쌓은 신뢰와 진심 그리고 끈기가 북측의 봉환 요구를 눌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말씀드릴 것은요, 우리 사회의 극히 일부에서는 평양으로 모셔야지 왜 한국으로 모셔왔냐? 혹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므로 현지에 그대로 두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홍범도 장군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크즐오르다에서 홍장군의 이웃집에 사셨던 고려인 어르신들을 만나뵈면, 홍장군은 죽어서 혼이라도 고국 땅을 밟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독립영웅을 고국산천에 모시는 것은 후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잖아요. 타국에 78년간이나 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한편, 홍장군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기념사업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ㅇ. 유해는 어떻게 수습했나?
“황기철 특사단장을 필두로 한 특사단은 14일에 우리 공군 특별기 편으로 크즐오르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만, 유해 수습을 위한 실무진들은 10일 항공편으로 입국해서 사전 준비를 진행했었습니다. 14일 카자흐정부대표와 우리측 특사단, 고려인 동포지도자 등이 참가한 추모식 후 본격적으로 파묘 와 유해 수습작업에 들어갔는데요, 사실 이때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돌아가신지 78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혹여나 백골이 진토가 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기적과도 같이 이날 홍범도 장군의 유골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유골이 수습되었습니다.
ㅇ. 홍장군은 190센티나 될 정도로 키가 컸다고?
“네 현지에서 유골수습을 한 박채원 외래교수(한성대)는 “홍범도 장군이 190센티에 달하는 우람한 체구였다고 들었는데, 유골을 덮고 있는 마지막 흙을 떠내자 한눈에 홍장군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큰 대퇴장골이 나왔다”고 했고, 국군유해발굴단은 홍장군의 DNA검사를 위해 대퇴장골의 일부를 시료체취를 위해 때냈는데 “수많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을 해 봤지만 이렇게 크고 건강한 유골을 보기는 처음이다”고 말해주었습니다.
ㅇ. 크즐오르다 현지에서 수습행사를 지켜보셨을 텐데?
“네 14일 추모식이 열렸던 홍범도 장군 묘역에는 홍장군의 얼굴과 한글로 ‘장군의 귀환’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하얀 휘장막이 쳐져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와 양국 국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휘장막 뒤에는 파묘와 유해수습이 진행될 홍장군의 묘소가 있었고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유해수습에 앞서 추모식이 거행되었구요, 우원식 홍범도 장군기념사업회장은 홍장군의 이력을 읽어 내려갔었습니다. 홍장군의 유골은 먼저 소관에 옮겨져 카자흐스탄 의장대에 의해 정중히 임시 봉안 장소인 크즐오르다 주립 병원 영안실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우리측 특사단과 동포지도자들이 홍장군의 뒤를 따랐습니다.
ㅇ. 홍범도 장군 유해는 특별기를 타고 모국에 왔죠?
“네 15일 아침 크즐오르다 공항 주기장에 대기하고 있던 우리측의 공군 특별기로 옮기는 봉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역시 카자흐정부대표, 동포지도자, 특사단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 국군의장대는 카자흐의장대로 부터 홍범도 장군 유해를 인수인계 받았습니다. 이에 앞서 그 전날 수습된 유골은 전날 밤 크즐오르다 주립병원 영안실에서 대관에 옮겨져서 공군 특별기로 가져온 태극기로 관포되었습니다.
이날 우원식 홍장군 기념사업회장은 공항에 나온 고려인 대표들에게 “마음 한편이 쓸쓸해지시겠지만, 고국에서 더 잘 모시겠다” 말하면서 그동안 홍범도 장군 묘소를 잘 관리해온 고려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믈 했습니다.”
ㅇ. 홍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간 것에 대해 현지 고려인 동포의 반응이 어떤지도 궁금한데?
“유해 봉환 소식을 접한 크즐오르다 고려인들은 홍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대한 소회를 피력했는데요,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들은 당당한 위상을 갖고 있지만 세대가 바뀔 수록 민족 정체성이 약해지고 있는 현실적 고민도 엿보였습니다.
오 세르게이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장은 “홍범도 유해 봉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카자흐스탄 정부에서 고려인 동포사회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면서 “처음에는 솔직히 뭔가 허전해 짐을 느겼지만 향후 10년이나 20년 뒤 상황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조국의 국립묘지에 모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옐레나 고려인협회 크즐오르다지회장은 “코로나19가 물러나면 홍 장군의 새로운 묘역이 어떻게 단장돼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어하는 동포들이 주변에 많다”면서 “유해 봉환을 계기로 현지인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ㅇ.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된 홍범도 장군은 동포들과 교류하며 사셨나?
“당연하죠. 그 당시 시기가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 그리고 전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활발히 활동하셨고 동포사회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셨고 동포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그가 광복을 앞둔 1943년 크즐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묻힌 뒤 고려인들과 옛 전우들이 성금을 모아 분묘를 손보고 철로 된 비를 세운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구요, 또 홍범도 장군의 생가를 지나는 길을 ‘홍범도 거리’로 명명한 현지 당국의 관심에서도 나타납니다
ㅇ. 홍장군이 수위로 일했던 고려극장에서는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공연도 했죠?
“당시 2차세계 대전중이었음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1942년도에 고려극장에서는 연출가 겸 문학부장이었던 태장춘 작가의 희곡 ‘의병들’를 무대에 올려 동포들을 눈물 짓게 했습니다. 이때 홍범도 장군도 맨 앞줄에 앉아서 보았다고 합니다. 고려극장의 1세대 ‘춘향’으로서 유명한 배우였던 이함덕은 태장춘의 부인이기도 한데요, 그 당시를 자주 회상하시곤 하셨죠. 이때에도 홍장군은 매우 정정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극장은 ‘날으는 홍범도’라는 연극을 자주 무대에 올렸는데요,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하기도 했었습니다
ㅇ. 홍장군의 가족이나 후손은 없나?
“불행히도 홍장군의 가족은 모두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부인은 일제에 잡혀가서 옥사를 하였고, 큰아들은 홍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에 사망했습니다. 둘째 아들도 요절했구요.
ㅇ. 카자흐스탄의 토카예프 대통령이 홍 장군과 관련된 사료도 전달했다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2021년 한국을 방문할 때 홍범도 장군의 사망진단서 와 고려극장 인사명령서를 우리측에 전달했습니다. 이중에서 “고려극장의 수위 홍범도 의원면직” 이라고 적혀 있는 인사명령서 원본을 전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