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12
김상욱(고려문화원장/ 한인일보 주필)
<지난 2016년 알마티 근교에 위치한 이식박물관에서는 열린 2017년 한-카자흐 합동 발굴조사에 대한 업무협정 체결식 후 양측 대표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2016년, ‘황금인간’이 발견된 알마티 근교에 있는 이식박물관에선 한국과 카자흐스탄 양국간에 업무협정 체결식이 있었다. 천산산맥 북면 초원지대 즉, 세미레치예(제테수 지역)에 퍼져 있는 고대 유목제국의 고분들을 발굴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었다. 마한문화연구원, 동서문명교류연구소 등 한국의 2개 기관이 카자흐스탄의 이식 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었다.그 전해에 한국에서 맺은 것과 합하면 국내의 4개 기관이 발굴조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 영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해외 고고학 발굴조사를 우리의 학자들이 직접 현지에서 진행함으로써 세계 고고학 분야와 한반도와 중앙 유라시아간에 교류사 연구에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은 이때 맺은 협약에 따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근교 캅차가이 호수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7세기부터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제패한 ‘스키타이’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발굴작업을 펼쳤다. 이 발굴조사에는 서울대 교수 권오영교수 비롯해서 국내의 고고학 발굴 전문가들이 포함된 유라시아 발굴단들이 수년간에 걸쳐 비지땀을 흘리며 발굴조사를 했다. 이를 통해 총 15기의 고분을 조사하며 카자흐스탄과의 학술협력 인연을 이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북방 유라시아의 역사적인 관련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앞장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전업 유목민은 말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재갈 멈치의 등장에 따라 기원전10~9세기 경에 나타난다. 이에 따라 동서로 약 8000킬로 미터의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전업 유목민이 등장하게 되는데, 기원전 7세기 경에 중앙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스키타이 라고 불리워지는 자들이 그들이다. 한국의 유라시아 발굴단들은 이들의 무덤을 조사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키타이는 기원전 6~3세기경 남부 러시아의 초원대지에서 활동한 최초의 기마 유목집단으로써 수많은 황금용기와 장신구, 청동단검 등으로도 유명한데, 스키타이 문화는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파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키타이는 어디까지나 북카프카스에서 흑해 북쪽 연안에 걸쳐서 거주하고 있던 집단의 명칭이며 언어적으로 이란 계통이었다. 이보다 동쪽의 카자흐스탄에서 알타이 주변까지는 이란계 집단이 퍼져 있었고 그 동쪽인 몽골고원에서 중국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는 투르크계 또는 몽골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스키타이의 유래에 대해 기존에 알려진 흑해 북안이 아니라 동방 기원설이 제기되었고 힘을 얻고 있다. 스키타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과거 소련시절에는 대규모 민족 이동을 인정하지 않고 남러시아(흑해 북안) 청동기 시대 주민이 그대로 발전하여 스키타이가 되었다는 토착설이 주류를 이루었고 또 현재까지도 많은 자료에는 이 학설이 소개되어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인터넷에 스키타이라고 검색해보면 ‘흑해 북안에서 발흥하여…. ‘ 로 시작하는 스키타이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크라이나 고고학자 테레노지킨 처럼 스키타이의 동방 기원설을 주창하는 연구자가 있었다. 카자흐스탄과 우랄에서도 흑해 북안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마구와 화살촉이 출토됨에 따라 스키타이 문화의 동방 기원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즉, 스키타이 이후 초원의 제국을 건설했던 주인공인 사르마트, 훈, 아바르, 몽골을 비롯한 수많은 유목민이 동방에서 이동해온 점을 고려하면 이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서서히 남하하면서 오아시스 정주민들을 지배, 동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편의 세계사를 써왔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지역도 처음에는 이란계 민족의 형질적 특징을 보였으나 이후 동방에서 온 유목민들에 의해 서서히 몽골리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카자흐인의 조상은 백인
굴미라 라일로브나 이식박물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지역에 살았던 선주민들의 유전적 특징은 유럽계통 70% 몽골리안 30% 정도인 유럽인의 모습이었는데, 이후 동방에서 온 오손, 흉노, 투르크, 몽골 등 유목민들과의 혼합과정을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거치면서 현재는 70 : 30 이라는 유전적 특징을 가진 아시아인의 얼굴을 보여주는 카자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이러한 입장은 이미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한 신화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세가지 설을 소개하면서 외래의 남신과 토착의 여신을 조상으로 하는 신화에 주목하였다. 즉 외부에서 이주해 온 스키타이가 토착민을 지배하게 된 상황을 상징화한 것으로 본 것이다. 다른 유목민인 마사게트의 공격을 받은 스키타이가 자신들의 초지(동방에 있는)에서 밀려난 후 서진하여 볼가 강을 건너 흑해 북부 연안으로 이주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스키타이는 원래 거기에 살고 있던 유목민 킴메르를 몰아내고 그 지역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동물끼리 싸우거나 맹수가 초식동물을 습격하는 이른바 동물투쟁문양이 유명한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은 대부분 유라시아 초원 지대 동부에서 기원했고, 그곳에서 급속히 서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는 인류 역사상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편이 이어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