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 13

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 13

몽골고원’ – 기마유목민 제국들의 발원지

                     김상욱(고려문화원장, 한인일보 주필)

<몽골고원은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만주,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 넘어 중앙아시아,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중국, 바이칼호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각각 접하고 있다.>

이번 호 부턴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의 정권아래 통합시켰을 뿐 아니라 그 에너지를 주변지역으로 확대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킨 징기스칸의 역사를 시작해 볼려고 한다.

허나 필자는 징기스칸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도 하지만 일부 독자들중에는 ‘징기스칸’에 관한한 박사급에 해당되는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볼 작정이다.  자칫하면 징기스칸을 너무 영웅화 또는 신비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도 하고 또한 외세에 침탈당한 우리 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바꿔볼려고 하는 필자의 오버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경계심은 징기스칸에 대한 이 원고가 자칫 일제시대 때 식민지배와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대동아공영권’ 류로 흘러버리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몽골고원의 주인들

아시다시피 세계역사를 움직인 두 세력은 군사력과 정치력이 앞선 북방 유목민과 경제력이 앞선 정주민들이다. 징기스칸은 이 두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몽골고원은 어떤 곳일까?

몽골 고원은 면적 272만㎢(남한 약27배), 해발고도 1.500m의 고원지대다.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만주,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 넘어 중앙아시아,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중국, 바이칼호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각각 접하고 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몽골고원은 여름에는 40℃ 가까이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40℃이하 까지도 내려간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의 한여름(영상 40도)과 한겨울(영하 40도)를 경험해본 필자는 이 기후가 얼마나 혹독한 지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자신의 콧속까지 얼어붙어 숨쉬기조차 곤란한 몽골고원의 긴 겨울은 사람과 가축이 서로의 체온을 보태야 할 정도로 춥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강인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몽골 고원은 여러 기마유목제국들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몽골의 국사 교과서에는 기원전 3세기 이후 6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에서 일어난 고대국가로 흉노(BC209~AD93), 선비(1~3세기), 유연(330~555년)등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 6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 건국 전인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했던 국가로 투르크(돌궐, 552~745년), 위구르(745~840년), 키르기즈(840~923년), 거란(901~1125년)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일부 독자들은 징기스칸 등장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흉노부터 거란까지도 몽골의 역사에 편입되어 있는 것에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 기술은 카자흐스탄에서도 반복된다. 카자흐스탄 국사 교과서에 보면, 스키타이부터 이 땅에서 일어난 고대 유목국가들에 대해 다 기술해 놓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원고를 써 볼 작정이다.

몽골족의 권토중래

<몽골족의 여름축제인 나담 축제 장면>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이 무너진 후 360여년 동안 몽골고원에는 통일적인 정권이 수립되지 못하고 권력의 공백이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고비 사막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키타이(거란)와 금 나라가 몽골 땅에 강력한 정권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교묘한 수법으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12세기 후반 몽골 고원 각지에는 여러 유목 집단들이 이 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동안 몽골 고원 동부의 타타르가 세력을 떨치다가 여진족이 세운 금의 공격을 받고 약화된 후에는 중부의 케레이트와 알타이 산맥 부근의 나이만이 새로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징기스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즉, 10~11세기에 많은 부족연합체가 형성됐고 11~12세기에는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몽골족의 5부족이 몽골 고원을 나누어 지배했다.

만주에서 바이칼 호에 걸쳐 떠돌아 다니며 유목생활을 하던 동호의 후예이자 실위족의 직계로 추정되는 몽골인들은 징기스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 밑에서 차례로 투르크나 다른 동호계 유목민들을 “몽골”이라는 부족 아래 통일 시켰다.

알려진 데로, 징기스칸은 ‘나라는 사람의 집합이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이런 전통은 원래 유라시아 유목민들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었다. 몽골어 ‘울루스’, 투르크어 ‘일’ 또는 ‘엘’을 비롯하여 나라를 나타내는 말은 원래 사람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나라를 만드는 데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징기스칸이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유목민 집단의 재편성이었다. 즉 그의 지배아래 있는 유목민을 수백명에서 1천명의 전사를 차출할 수 있는 95개 집단, 즉 천호로 편성했다. 천호는 몽골유목민의 군사, 정치, 행정, 사회의 기초가 되는 조직인데 그 아래로 백호, 십호 등 십진법 체제로 조직되어 있었다.

국가의 요체인 천호장에는 몽골고원을 통합할 때 협력한 공신들이 임명되었다. 십진법 제도는 흉노 이래 초원 국가 의 전통이었고 몽골 고원을 통합하기 이전 타타르,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을 비롯한 여러 세력 역시 십진법 체계로 백성을 조직했다.

이렇듯,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유목민들의 전통을 잘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혁신을 통해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분에 구분 없이 능력과 업적에 따른 공평한 인사였다. 징기스칸이 가장 중용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목동의 아들이었던 스부데이였다. 스부데이는 평생 징기스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후 손자인 바투를 모시고 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했던 용장이다.

그는 몽골전사들에게 ‘바람같이 빨리 달리며 공격할 것’ 요구했다. 실제로 몽골군은 1241년 초 헝가리 정복전에서 하루 평균 1백km를 주파했다. 이 속도는 2차세계대전에서 기록된 독일 기갑 군단의 돌파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그리고, 궁수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한 징기스칸은 몽골 고원을 통합할 때 뿐만 아니라 이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 원정을 나설 때에도 적극 활용하게 된다. 몽골기만군단은 적과 200∼300m 쯤의 거리를 두고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 돌격하여 요절을 내는 전술을 구사했다.

더불어 늑대의 지혜와 적으로 부터도 배울 것을 부하장수들에게 강조함으로써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하는 정착민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몽골비사에는 ‘징기스칸께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먹으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먹어야 한다. 또 전우보다도 많이 먹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옷으로 부하들을 입히고 자신의 말에 부하들을 태운다.’ 고 적혀있다.

적에게는 무자비했을 지라도 부하와 부족민들에게는 너그러웠던 징기스칸은 이런 철의 규율을 세우고 불멸의 군대를 만들어갔고 누구도 하지 못했던 유라시아 통합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  (계속)

Share With:
Rate This Article

almatykim67@gmail.com

No Comments

Sorry, the comment form is closed at this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