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 주치 울루스 성립 800주년 특별 기획’ – 14
몽골제국시기의 특징 : 동서문화교류
고려인 강제이주에 버금가는 대규모 민족이주 일어나
김상욱(고려문화원장, 한인일보 주필)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와 초원지대를 거쳐 서아시아, 그리고 남러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이라는 통일 정권 아래에 통합되면서 다양한 인간 집단들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난다.
먼저, 몽골원정군에 참가한 유목전사들은 신천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고, 반면에 정복지의 유능한 인재와 장인들은 몽골 본토로 이주 되었다.
대표적으로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킵차크 초원 출신의 킵차크, 아스, 캉글리 등 유목민을 새로운 군단으로 조직하여 자신에게 직속하는 친위 군단으로 만들었고, 윈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무슬림이나 위구르인을 대거 참여시켰다. 유라시아 각지의 몽골 정권은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인재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집단 이주는 몽골제국 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도미노 현상이 되어 주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몽골 군대의 진격을 피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간 투르크계 유목민들이다. 이들의 이주는 11세기부터 진행되어온 이 지역의 투르크화를 촉진시켰다. 그래서 오늘의 터어키인들이 선조들의 고향 ‘알타이’산맥을 떠나 아나톨리아반도에 살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12세기 후반부터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북인도를 침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중앙아시아, 이란, 아프카니스탄에서 많은 무슬림이 북인도쪽으로 유입되어 이 지역 이슬람화의 진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더불어, 몽골 내부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인 자신의 이주를 불러오는데, 훌레구 울루스에서 맘루크조로 망명하여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서쪽의 오아시스 바흐리야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과 시리아 북부로 이주하여 이슬람화한 군단도 있었다.
두번째로,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동서 두 세계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촉진되었다. 제국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이 정비되고 교통로의 안전이 확보되면서 여행자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과 서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게 취안저우를 비롯한 중국 동남부의 항구 도시와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가 활성화되었다. 이른바 ‘아시아의 순환 교통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위구르 상인과 무슬림 상인들이 대규모 상업 활동을 전개했다. 몽골 제국을 축으로 하는 상업망은 훌레구 울루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제노바,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인과 비잔틴 상인의 참여로 지중해 세계까지 확대되었다. 사실 1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적 규모의 경제발전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때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대규모 경제권이 형성되고 사람과 물건, 문화와 정보가 활발하게 교류되었다. 이때 대도(북경)에는 전세계에 최고급 특산품과 진기한 물건을 휴대한 통상 사절단으로 넘쳐났다.
이와 함께 종교인의 왕래도 활발했다. 중국 도교 교단의 장로 장춘진인은 징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중앙아시아 각지를 여행하였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로마 교황의 사절들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또한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사절로 역시 몽골을 방문한 수도사, 대도에 카톨릭 교회를 연 몬테코르비노 신부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동서문화교류는 또한 무서운 전염병의 유행을 불러왔다. 바로 유럽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페스트의 창궐이다. 이 병은 원래 야생 설치류에 나타나는 동물들 사이에 전염되는 유행병이었는데, 몽골제국시대에 야생의 설치류 동물이 많은 서식하는 중앙유라시아 초원을 통한 교역이 확대되면서 페스트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던 것이다. 흑사병이라 불린 이 역병은 14세기 중엽 중동과 유럽 각지에서 맹위를 떨쳐 대략 2500만명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몽골제국의 해체
몽골제국의 해체는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와 장기간에 걸친 평화로 인한 국력 낭비와 방탕한 재정 운용, 국고 탕진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연이은 자연재해와 역병으로 농민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고 각지에서 무장세력이 할거했다.
원나라의 경우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홍건적의 반란 와중에 입신한 주원장이 난징에서 명나라를 창건했다. 이때 자연재해와 내분에 시달리던 원의 토곤 테무르는 결국 대도를 떠나 몽골 초원으로 퇴각하게 되는데(1368) 명나라 군대에 의해 점령된 이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과거에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원나라가 멸망했다고 얘기 했다. 그러나 원은 결코 이때 멸망하지 않았고 단지 정치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약 20년 동안 원과 명은 화북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의 지배자들은 그 후에도 100여년 동안이나 대원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과거의 영역을 다시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1604년 대칸으로 즉위한 릭단이 1634년 칭하이 원정 도중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제이가 대대로 전해오던 원 황제의 옥새를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 홍타이지에게 헌상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로써 원나라는 명실상부하게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