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День Победы' '졘 빠볘듸' 라고 불리는 2차 대전 전승기념일인 9일.
알마티의 판필로바 공원에는 올해도 수많은 시민들이 무명용사들의 넋을 달래는 '영원의 불꽃' 제단 앞에 꽃다발을 올려놓는다.
소련의 일원으로 2차대전에 참전한 카자흐스탄 국민들은 나찌 독일의 침략에 맞서 고향과 조국을 지켜낸 이 날이 오면 전국 어디에서나 꽃다발을 들고 손자의 손을 잡고 가는 노병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날은 비단 카자흐스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소련 구성국들에서는 매우 큰 기념일 중 하나로 자리잡혀 있다.
이 날은 사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더 성대히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이다. 피할 수 없는 적과의 생사를 건 결전에서 아주 큰 희생을 치르며 승리했기 때문이다.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결국 역으로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감격스러운 승리의 날인 것이다.
2015년 기준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어있는 나라는 당연한 러시아 외에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조지아, 몰도바, 그리고 친러 성향이 강하고 여러차례 반나치 빨치산 투쟁을 이어갔던 세르비아이다.
한편, 구소련 해체 후 러시아와 전쟁까지 했던 조지아에서도 여전히 기념되고 있는 것은 승리의 날이 러시아 외의 구소련 국가들에게도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카자흐스탄은 5월 7일을 조국 수호자의 날 겸 남성의 날, 5월 9일을 승리의 날로 각각 기념하고 있다.
비록 올해는 대규모 열병식을 열지 않았지만 2015년도 아스타나 출장길에 본 군사퍼레이드는 정말 장관이었다.
이날이 되면 참전했던 노병들에게 꽃을 선물하고 꺼지지 않는 불 앞에 꽃을 바치며 전쟁 당시 사망한 전몰용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관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
승리의 날이 중요하게 대접받는 이유는 단순히 한 전쟁에서 이겨서만이 아니다. 2차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고 그런만큼 승리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약 4년간의 독소전쟁 동안 군인과 민간인 합쳐서 대략 2,8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다른 나라는 독일 900만, 폴란드 600만, 프랑스 60만, 영국 45만, 미국 40만 정도이다.
전쟁 막바지에는 스탈린조차도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이제 우리나라엔 전쟁으로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걸세."라며 그의 몇 안되는 진실로 침통한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큰 아들을 독일군에게 잃었다. 스탈린은 종전 후 승전 축하연에서도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하고 연설을 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의 게르만-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Untermensch)'인 슬라브족을 정복한 후 추방, 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 년 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권에서는 단순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보아 '동부전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의 '전선'으로 치기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의 비중도 독소전쟁이 대부분이다.
만약 독소전쟁이 없었더라면 독일이 대(對) 소련 전선에 퍼부었던 400만 대군이 오롯이 서부에 집중되었을 것이고 영국과 미국의 베를린까지의 진격은 더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적인 인명 피해를 냈을 것이다. 그만큼 2차 대전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개전 시점 독일과 소련은 세계 2~3위를 다투는 경제대국이자 공업강국이었다. 이들 국가는 이렇게 강력한 열강이었고, 이 두 국가가 치른 독소전쟁은 단순히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을 넘어 상대 민족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목적의 절멸전쟁이었다.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900만 여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40년대 일제강점기 하의 한반도 인구가 2,500만 명,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인구를 가진 국가가 소멸할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4,000명,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소련군의 군사적 피해도 막대했다. 전차, 돌격포, 자주포만 9만 6,500대를 손실했으며 3만 7,000여대의 기타 기갑 차량도 손실했다. 항공기도 10만 2,600대를 손실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다가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군사력과 전투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우랄로의 산업 이전을 통해 소련 군수공장들은 안전하게 대규모의 전쟁 장비들을 생산할 수 있었고 연합군에게 전략 폭격을 두들겨 맞아 초토화되던 독일의 군수 공업 역량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역량 및 미영의 지원을 기반으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을 성공하다 못해 나치의 심장부인 베를린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험이 너무 강력한 트라우마였던 탓인지,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부족했음에도 미국과 벌이는 군비경쟁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 남은 50년의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전쟁 후 소련은 폐허가 된 본토의 전후복구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포로로 잡은 수백만의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끌고가서 공사현장이나 광산에 보내어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10년 넘게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서독의 노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독소전쟁은 독일과 소련뿐만 아니라 양대 강대국 사이 주 전장이었던 동유럽 지역 일대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주로 독일에 의해 5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 학살 외에도 바그라티온 작전과 바르샤바 봉기,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전 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했다. 폴란드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되었고 다른 대도시들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현대 미화로 환산할 시 8,500억 달러(한화로 928조 원)의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김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