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과 카자흐스탄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본지 주필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북쪽과 동쪽의 관계 외에도 알아보아야 하는 곳이 있다. 이 국가의 또 다른 축은 남쪽, 즉 중동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는 현대 외교가 성립되기 한참 전인 수천 년에 걸친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교류 속에서 형성된 깊은 구조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란과 투란 Iran–Turan’이라는 오래된 세계관이다. 고대 페르시아 전통에서 ‘이란’은 문명세계를 의미했고, 그 북쪽과 동쪽, 즉 아무다리야 강(옥수스 강) 너머의 지역은 ‘투란’이라 불렸다. 투란이라는 말은 페르시아 세계가 인식한 북방 유목 세계전체를 가리켰다. 중세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에서도 이란과 투란은 끊임없이 대립하는 두 세계로 등장하는데, 이는 곧 정주 문명과 유목 세계의 상징적 충돌을 의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투란’이라는 공간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이 포함된 지역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세기 지도에서도 투란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이란과 카자흐스탄의 관계는 현대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이어져 온 ‘남쪽의 이란 세계와 북쪽의 초원 세계’라는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대립만이 아니라 교류의 역사이기도 했다.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부터 이란과 중앙아시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크로드는 이 두 세계를 이어 주는 핵심 통로였다. 페르시아어와 문화, 학문은 중앙아시아 전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언어와 건축, 문학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 도시들과 오늘날 카자흐스탄 남부지역의 건축 양식과 문화적 전통에는 페르시아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는데, 이 역시 오랜 공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란 문헌 속에는 북쪽 초원지역, 즉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어 양 지역이 지속적으로 교류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는 이슬람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슬람의 확산은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었고, 튀르크-페르시아 문화라는 독특한 결합을 만들어 냈다. 이 문화가 이후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을 거치면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카자흐 초원 역시 이 흐름 속에 포함되었다.
결국 이란과 카자흐스탄의 관계는 ‘이란 vs. 투란’이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서, 충돌과 교류, 융합이 반복된 복합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반 위에서 현대의 관계가 형성된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이란과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양국은 1992년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이후 정치·경제·문화 협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왔다.
현대 국제 정치에서 이란은 카자흐스탄에게 외교 파트너 이상의 존재로, 중요한 지정학적인 의미를 갖는 국가이다. 카자흐스탄은 내륙국이며 해양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란은 카자흐스탄이 남쪽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카스피 해를 통한 연결은 이 관계의 핵심이다. 카자흐스탄 서부의 항구에서 카스피 해를 건너 이란 북부 항구로 연결되는 물류 경로는 러시아를 통과하지 않는 대안적 루트로서 전략적 가치가 크다. 이는 외교적 자율성과도 직결되는 복합적인 교역 문제이다.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경로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러시아–서방 갈등이 심화되면서 기존의 북쪽 물류 경로가 불안정해지고 이에 따라 카자흐스탄은 남쪽 경로, 즉 이란을 통한 연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중이다. 뉴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선택지를 늘리려는 전략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양국 관계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에너지 협력, 물류 협력, 농업 및 산업 협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카자흐스탄의 곡물과 이란의 항만·운송 능력은 상호 보완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카스피해를 중심으로 한 공동 프로젝트들은 양국 관계를 단순한 교역 수준에서 전략적 협력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정치적인 결정에서 역시 카자흐스탄은 이란과의 관계에서 신중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이지만 동시에 서방과 갈등 관계에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자흐스탄은 이란과 협력을 확대하면서도 국제 제재와 외교적 리스크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점에서 카자흐스탄의 대이란 정책은 전형적인 ‘멀티벡터 외교’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협력은 유지하는 방식이다.
중동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카자흐스탄과의 관계는 더욱 다층적으로 나타난다. 카자흐스탄은 이슬람권 국가들과 많은 부분에서 문화·종교적 공통점을 보이며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협력과 경제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걸프국가들과의 투자 협력, 튀르키예와의 문화·정치 협력은 카자흐스탄이 중동과 연결되는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이처럼 카자흐스탄은 북쪽의 러시아, 동쪽의 중국뿐 아니라 남쪽의 이란과 중동까지 포함하는 다층적 외교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유라시아 중심 국가로서 취할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인 것이다. 결
국 중요한 점은 중동과 카자흐스탄의 관계가 현대 외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이미 고대 이란과 투란이라는 개념 속에서 형성되었고 실크로드를 통해 강화된 이래, 이슬람 세계를 통해 하나의 문
화권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오래된 연결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뉴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에서 내륙국 카자흐스탄은 유라시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전략적 축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유럽, 남쪽으로는 이란과 중동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 속에서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가까운 위치에 서 있다.
과거 페르시아인들이 북쪽을 ‘투란’이라 부르며 하나의 세계로 인식했듯이, 오늘날 국제 정치 역시 이 공간을 다시 하나의 전략적 단위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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