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번 호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은 언제부터 존재했었나?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와 국경선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연방 성립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36년 카자흐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중의  하나가 되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상태였나?

고대부터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땅이었던 이곳은 징기스칸이 세운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징기스칸 이전에도 훈제국, 돌궐제국(투르크제국) 등 수많은 유목제국이 성립되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성측면에서 보자면  대몽골국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징기스칸 사후 최근 19세기까지도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나 그 일족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피의 정통성’을 통한 통치의 정당성 확보라는 유목사회의  오랜 전통이  매우 강하게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몽골국의 부흥을 목표로 내세웠던 티무르마저 티무르대제국의 건설 이전부터도 현재의  우즈벡지역에서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자신이  직접  칸의 지위에 오를 수는 없었다. 징기스칸의 일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징기키스탄의 피를 물려 받은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비로소 칸 가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자신이 스스로를 칸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땅(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은  징기스칸 생전에 그 아들들에게 나눠졌던 4칸국중 큰아들  주치의  영지였던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과 차가타이칸국(카가타이 울루스)이 시르다리아강을  경계로 서로  교류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북쪽의  유목민들과  남쪽의 오아시스  농경민들은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교류하면서 살아왔다.

카자흐칸국의 탄생

그러던 중  15세기가 되면서 킵차크칸국(주치 울루스)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그  동부지역에는 ‘우즈베크’라고 불리는 유목민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을 통솔한 사람은 주치의 다섯째 아들 샤이반의 후손인 아블 하이르칸 (1428~1468)이었다.

아블  하이르칸은 종가인  킵차크칸국으로 부터  분가를 선언하고 서서히 남하하여 티무르제국의 영역인 호라즘을 약탈하고 그를  추종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하여 1446년 ‘우즈베크 울루스’ 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자흐스탄의 남부지역을  흐르는  시리다리아 강  중류지역을  근거지로 삼아오던 유목민들은  케레이칸과  자니 벡  칸(두 사람  모두 주치가문의  일원)을  따라 천산산맥 북쪽 세미레치 지역(오늘날의  알마티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카자흐칸국을 세우게 된다.  이들이 오늘날  카자흐 민족의  기원이 된다. 이들은 킵차크  초원의 유목민들을  추가로 받아들여 자니  벡의 아들인  카심 칸 시대에는 강력한  유목국가인 카자흐칸국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시르다리아 강  중류  유역과  세미레치에 지방의 오아시스  도시를 지배 아래에  넣고 주위의  여러  세력을  위협했다   이들은  적어도 18세기  전반기까지 대, 중, 소 쥬즈(오르다)   라는  카자흐인들의  정치  연합체를 구성하며 살았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와서  정치인들의 출신 배경을 비롯한 현재의   카자흐의  정치와  사회실태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분석틀로써 사용되어 지고 있다.  옛 소련의 카자흐 공산당은  대부분 대 쥬즈(울르 쥬즈)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립 후에도 대쥬즈  출신인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이 되고  기타 중,  소쥬즈를 대표하는 정치집단이 존재한다     

한편, 아블 하이르칸의  손자인 샤이바니는  카자흐원정은 실패하지만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비옥한  오아시스 농경지대)를 차지하게 되는데, 부하라에 입성하고  사마르칸트까지 정복하여17세기초까지 이 지역을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원형을 만들어나갔다.

주변정세 : 러와 청제국의  등장

  킵차크칸국과 티무르제국간의 관계는 한마디로 ‘협력’과 ‘경쟁’ 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대몽골국의 후예들중에서 종가를 자임해온 킵차크칸국은 과거 차가타이칸국과 일칸국의 영토를 모두 아우른  티무르제국은 물론이고 징기스칸의 직할지 였던 몽골 고원과 중원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이나  후계자 선정 등의 일에 간여를 하여 분쟁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종가로써의 권위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대대로 비옥한 페르시아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킵차크칸국의 칸들은 티무르가 페르시아와  아랍, 소아시아지역까지 정복하자 잦은 갈등을 빚어왔다. 때로는 형제국으로써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기습적인 약탈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는 티무르의 킵차크칸국에  대한 원정을 불러왔고 수도 바투사라이가 그의 손에 함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런 역사가 전개되자 킵차크 칸국의 중앙권력 약해지고 칸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세금이나 공물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반기를 지방정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16세기 접어들면서 세력을 키운 모스크바 공국은 루시인들이 사는 땅의 북동부를 중심으로 짜르 러시아를 세우고 분열된 킵차크 칸국의 후예들인 크림칸국, 카잔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리 칸국 등을 차례로 손에 넣으면서 대제국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때 러시아를 동진시킨 주요 동력은 모피였는데, 마치 미국의 골든러시 때문에 서부개척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시베리아산 모피는 유럽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구가하였고, 러시아의  모피 사냥꾼들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베리아 진출 60년 만에  베링해에 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한편,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의  대칸인 쿠빌라이가 몽골고원과 중원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세운  원은  주원장이  세운 명에 의해 중원을  빼앗기고 몽골고원으로 축소되었다가  마침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이 세운  후금(나중에  대청으로 고침) 에 의해 징기스칸으로  부터 내려오던 대몽골국의  옥쇄를 헌납당하게 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대몽골국의 정통성과  유라시아유목민에 대한  종주권은 청으로 넘어가고 청의 황제는 중원에 사는 한족들의 황제임과 동시에 유목민들의 대칸으로서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  더해  17세기에  접어들면  몽골고원에서는 대몽골국의  부흥을 내걸고  서몽골 지역의  오이라트부가 몽골고원을 통합하게 된다. 이들은 세계적 제국으로 발전한 청과  러시아 사이에서 과거 대몽골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준가르 유목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준가르는 한때 몽골고원과 티벳을 연결하여 큰 세력을 떨치게 되고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동부지역인 세미레치에를  자주  침략한다.

카자흐인들은  이 때를 ‘수난의  시기’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 같은  유목민으로서 좋은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잔인한 복수를  동반한 전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카자흐인들은  서쪽의 러시아 짜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이는 19세기 말까지 진행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또는 카자흐에  대한 러시아의  병합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하게 된다.

18세기 말에는 아블라이 칸이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내부 갈등을 통합하고, 청과 러시아 사이에 균형 외교를 펼치며 준가르 잔당들을 제압했으나, 그 후임자들은 러시아에 휘둘리게 되었고 청의 준가르 정복으로 인해 알마티와  일리 강 지역과 발하쉬 호수 동남부는 청의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8개의 러시아식 행정구역을 두어 지배하에 두었다가 1860년대에 이르면 카자흐스탄 전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 및 적백내전 기간 동안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키르기스 자치 공화국’의 일부로서 편입되었다가 1924년부터 추진된 민족 구성을 바탕으로 한 자치 공화국 구성 개편으로 1925년 4월부터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명명되었다가 1936년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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