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기획특집[기획 시리즈 – 14]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기획 시리즈 – 14]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은 올해로 독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8 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자 한다.  또한 소비에트 해체로 다시 한번 찾아온 새로운 국가건설의 과정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

민족경계획정’ 작업과 중앙아시아 5개국의 탄생 

지난 호(13회)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수립시킨 10월 혁명과 뒤이은  내전으로 인한 혼란기 동안  중앙아시아 즉,  투르키스탄에서는 ‘바스마치’ 운동이라는 저항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는 내전과 소비에트 정권 초기 일부 정책적 오류 등이 겹치면서 지역민들의 호응속에 소비에트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확대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모스크바의 정책은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중에서도 현재 중앙아시아 5개국이 탄생되는 즉,  티무르제국 이후 부하라칸국, 히바칸국, 코칸드칸국 으로 나뉘어져 있던 이 지역에 현재와 같은 5개의 나라가 만들어 지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던  ‘민족경계획정’ 작업에 대해 알아보겠다.

‘민족경계획정’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바스마치’ 운동을 다시 한번 상기해봐야 한다.  이는 한마디로 제정 러시아 영토내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제정 러시아와 소련에 반기를 든 봉기였다.

이 운동의 근원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 징병으로 인해 반러시아 감정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1916년 중앙아시아 폭력사태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달 후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폭력사태는 투르키스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코칸드칸국의 수도가  있었던 페르가나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봉기로 발전하였고 볼셰비키와 반혁명파간의 내전이 발생하자 수 년 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게릴라전 및 재래식 야전을 전개하면서 소비에트 정권에 저항했다. 마침내, 1924년 4월 사마르칸트에서  ‘투르키스탄 투르크 독립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 부터 6년동안 중앙아시아를 반 소비에트 저항운동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바스마치’운동은  1924년 붉은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즉시 ‘민족  경제 획정’ 작업이 추진하게 된다.

이는 혁명 후에도 제정 러시아 시대의 행정구역에  기초하고 있었던  투르키스탄 자치소비에트공화국과 부하라 소비에트공화국, 호라즘(히바)소비에트공화국을 모드 해체하고 여기에 중앙아시아 역사상처음으로 1민족 1국가의 국민 국가를 수립하기로 위한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같은 해 10월 성립된  우즈베크와 투르크멘의 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필두로 하여 현 공화국 시스템의 원형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투르키스탄 북부의 카자흐인 거주지역이  키르기스스탄자치공화국에 편입되어  카자흐인의 통합이 실현되고 나중에 카자흐스탄이 된 카자흐자치공화국이 성립(1925년)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는 언듯 보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도 상응하고 근대 유럽의 개별 국민국가 원칙에 맞는 듯이 보이지만, 향후 갖가지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경계 획정 토론에 참가한 한 카자흐 대표는  “중앙아시아는 지역, 경제, 민족학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단일체이다.  그래서 경계 획정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를 절단하여 머리와 손발과 몸통을 따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중앙정부의 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개별 민족국가로 분할하는 이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무슬림 공산주의자와  자디드  지식인들의 범투르크주의를 막고,  혁명과  내전과정에서  증폭된 민족 사이의 적대관계를 제거하여 여러 민족의 발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개별 민족공화국의 건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원리에도 들어맞았다.  그러나 민족의 실체가 아직 확실하지 않고 다양한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었던 중앙아시아 상황에서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자들이 특히, 북방 유목민들이 토착민들을 지배하면서 동화되어 현지화되어 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남미 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통치되면서 오랜 기간 인종 융합이 일어남으로써  백인 부부 사이에 흑인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중앙아시아도 이에 못지 않게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민족간에 교류와 융합이 일어난 지역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독자적인 계보의식과 부족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카자흐, 키르기스,  투르크멘 등 유목민들은 개개 민족으로 편성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민인 우즈베크와 타지크의 경우에는 그 구별이 다분히 자의적일 수박에 없었다.

이때 생겨난  우즈베크인이라는 민족은 유목 우즈베크의  여러 부족을 비롯한  부족 조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목 또는 반유목 투르크계 집단과 그들이  이동해 오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투르크계 정주민(이른바 샤르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사회, 문화적으로 볼 때 전자보다 오히려 이란계 언어를 쓰는 타지크인에 가까웠다.

실제로 구소련 해체 후 우즈베키스탄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신생 독립국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고 티무르와 같은 민족 영웅을 재조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까리모프 전 대통령의 어머니도 타지크인이었다.

페르가나 분지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국경선을 긋는 일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고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이때 탄생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다민족 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민족별 공화국이 수립되자 소수 민족에 대한 동화의 힘이 미치기 시작했다.   예를들면,  우즈베크령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서   거주하는 타지크어  사용 주민 대부분이 우즈베크인이 된 것은 나중에  심각한 민족 문제를 불러왔다.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인  타쉬켄트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카자흐와  우즈베크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공화국은 개별적인 문어를 제정하고 역사를 편찬하여 국민 통합을 진척시키려고 했다.  각국의 새로운 국어는 예전의 차가타이어나 공통 투르크어와 다른 개별 민족의 구어에 기초한 문어였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민족어의 지위는 곧 러시아어가 소비에트 연방 공통어로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자 흔들렸고,  아랍문자로 표기해오던 것을 일시적으로 라틴문자로 바꾸기도 했지만,  이 역시  1940년 이후에는 모두 키릴 문자로 전환되어 구소련의 해체시기 까지 사용되었다.

  혁명기 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  티무르와 차가타이어를 내세워  투르키스탄의 역사, 문화적 일체성을 주창한 피트라트 같은 사람들은 범투르크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로 단죄되어  활동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투르키스탄’이라는 단어도 소련의 실용어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초원이라는 새로운 지역 명칭이 정착되었다.

요컨대, 경계선 획정은 중앙아시아를 개별 민족 공화국으로 나누고 그들을 소비에트 연방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체계에 통합하기 위한 전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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