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독립 30주년을 맞아, 본지는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카자흐스탄의 주요도시의 변화발전상을 위주로 7번에 걸쳐 살펴보았고 8 편부터는 카자흐스탄의 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가졌던19세기와 20세기 초의 카자흐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따라가보았고 18편부터는 카자흐스탄 정치 엘리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는 카자흐스탄의 독립과 이후의 정치,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고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우뚝서는과정속에서 고려인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를 살펴보면서 모두 21회에 걸친 기획시리즈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편집자 주>
카자흐 독립 30주년과 고려인
1991년 12월 16일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독립에 관한" 헌법에 서명했다. 이로써 마침내 소비에트 연방의 한 구성원이었던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국가로서 법적 등록을 완료했고, 새로운 독립 국가로서 진정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후 30년이 흐른 2021년 2월 5일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경축 준비를 위한 국가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토카예프 대통령은 엘바스 나자르바예프의 영도하에 카자흐스탄이 독립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카자흐정부는 독립3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13일에 수도 누르술탄과 알마티 등 주요도시에서 그동안 국가발전에 공로가 각 지역과 분야별 일꾼들에게 훈포장 수여식을 가졌다. 당연히 이 속에는채유리, 강게오르기, 김겐나지 등 낯익은 고려인 이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 후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의 발전에 고려인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다.
사실, 독립 후 카자흐스탄은 경제적 혼란으로 무척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93년 기존의 루블화가 아닌 텡게화를 발행함으로써 독립된 통화권을 가진 진정한 독립국이 되었고 이후, 풍부한 석유와 가스를 기반으로 과감한 체제이행을 선언하였다. 자원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혼란과 텡게화의 급속한 가치 하락 등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엘바스 나자르바예프는 뚝심있게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더해 97년 12월, 수도를 알마티에서 누르술탄으로 옮김으로써 카자흐스탄의 명확한 발전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들은 10년 뒤부터 국민들이 실감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카자흐스탄은 그동안 꾸준히 추진한 외국인 투자유치와 시장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두자리 수 경제성장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외국기업들이 앞다쿠어 카자흐스탄으로 진출하였다. 여기에는 한국의 자원기업, 건설회사, 자동차, 전자회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고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때 얻은 자신감으로 카자흐스탄은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과 이후 동계 유니버시아드까지 성공적으로 치루었으며 2017년 아스타나 엑스포라는 큰 국제 행사까지 성황리에 마쳤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의장국까지 무난히 수행했다. 카자흐스탄의 국제적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도 카자흐스탄은 신속한 방역조치 자체 백신개발, ICT기술을 활용한 백신여권발급과 확인시스템을 신속히 도입함으로써 보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한편 30년 전, 고려인 동포사회는 갑작스런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연이은 정치,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소비에트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교육받아온 고려인들은 이 사태앞에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88서울 올림픽과 한-소 수교 그리고 소련해체와 카자흐스탄의 독립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시기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기존의 역사적 조국(북한) 외에 또 하나의 역사적 조국(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특히,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 올림픽을 다녀온 동포들은 한국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체전에 대규모 방문단을 보낸 동포사회는 이후 ‘고려문화중앙’을 창립하고 모국어재생과 민족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했다. 이러한 모국과의 교류들은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와 카자흐스탄의 독립 초기의 혼란과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소련의 해체와 독립된 카자흐스탄에 닥친 적발한 문제는 생필품의 부족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인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경제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자 공장은 문을 닫고 물자 부족은 극에 달했다. 이때 고려인들은 한국으로 달려갔다. 동대문과 남대문시장에는 소련에서 온 동포 보따리 상인들로 넘쳐났다. 이들의 보따리에는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가죽 잠바와 신발을 비롯하여 여성용 스타킹과 체육복 등 실로 다양한 제품들이 포함되었다. 이후 보따리상 대열에는 고려인들 뿐 아니라 카자흐, 러시아인들도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의 실어오는 물품으로 시장이 서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자본을 축적한 고려인들은 본격적인 비즈니스에 눈을 떴고 이후 성공한 고려인 기업가로 성장했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부를 이룬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채유리 카스피그룹 회장(전 상원의원), 김에두아르드 테그노돔 회장 등이 실례이다. 이들의 활동은 카자흐스탄의 경제계에 큰 자극을 주었고 시장경제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권투 감독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최유리회장의 사례는 눈부시다. 고려인협회장 또는 고려일보 총주필의 자격으로 더욱 빈번히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기업인들과도 잦은 접촉을 하게 된 채회장은 한국기업과의 합작사업들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마침내 고려인협회 회장을 디딤돌 삼아 상원의원이 되기에 이르렀다. 체육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채유리 회장은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갔고 한국내 고려인 사회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김 블라지미르 카작무스 회장처럼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지식을 쌓고 있던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에 자문을 하면서 성공한 기업가로 성장한 케이스도 있다. 그는 삼성물산의 제즈까즈간 구리사업을 자문하면서 나중에는 이 기업의 회장이 되었고, 런던 증시에 상장하므로써 일약 세계적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카자흐스탄 기업들이 외국기업들과 합작사업을 하는데 모범사례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김 유리 헌법위원회 위원장,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던 니 블라지미르 대통령 총무수석, 허가이 알렉세이 전 건설부 차관 등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연결하는 접착제와 윤활유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게오르기 민족정책위원회 위원장, 박이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리 V.G 지질학 박사, 황미하일 V 생물학 박사, 김 V.A법학박사, 김승화. 역사학 박사, 데니스 텐 등은 과학 기술과 학문, 스포츠분야에서 카자흐스탄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돌이켜 보면, 카자흐 대 초원과 한반도는 고대부터 서로 교류하면서 연결되어 왔고 이후 수세기 동안 동서양을 연결한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와 한반도를 서로 연결하였다.
카자흐스탄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고려인들은 마치 동서양을 연결했던 ‘실크로드’와 같은 존재이다. 독립 이후 지난 30년 동안 고려인들의 이런 특성과 역할은 특히 경제분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독립기념일인 16일 밤에는 수도 누르술탄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의 모든 도시들에서는 밤을 환하게 밝히는 축포가 쏘아 올려질 것이다. 이 축포와 함께 한국과 카자흐스탄 관계가 더욱 밀접해 지는데 고려인의 큰 역할을 기대해 본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모국과 카자흐스탄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해 온 지난 30년간의 역사가 이를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