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의 넋은 아직도 크즐오르다에
탐방단,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추모공원 참배
유해 봉환했어도 기념시설과 홍범도 거리 등 여전
1937년 8월부터 12월 사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스탈린의 강제 명령에 따라 18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은 ‘와곤(Vagon)’이라고 부르는 기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렸다. 40일 동안 밤낮없이 달려가는 기차 속에서 2만5000에서 3만 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홍범도 장군도 그 안에 있었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내렸다. 홍범도 장군은 1939년 3월 25일부터 크즐오르다에 세운 고려극장에 취직한다. 고려극장은 애초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세웠으나 강제 이주로 크즐오르다까지 오게 된 것이다. 현재는 알마티에 있으며 카자흐 5대 국립극장이라는 대우를 받고 있다.
홍 장군은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943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나 그곳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2021년 8월 14일, 영면(永眠)에 들었던 장군을 깨워서 장군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시기까지는 그곳에 장군의 말년이 있고, 그곳이 유택이었다.
장군의 유해와 넋이 대한민국 현충원으로 봉환돼 3년이 흐르는 동안,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흉상 철거 시도라는 우환을 겪고, 급기야 2024년 광복절을 앞둔 8월 8일에는 “친일파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라는 뉴라이트 인사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이동순 시인이 쓴 <홍범도 장군의 절규>라는 시가 쩌렁쩌렁 귓전에 울리는 상황이다.
해방조국은 허울뿐 / 어딜 가나 왜놈들로 넘쳐나네 / 언제나 일본의 비위를 맞추는 나라 / 나, 더이상 견딜 수 없네 // 내 동상을 창고에 가두지 말고 / 내 뼈를 다시 중앙아시아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보내주게 / 나 기다리는 고려인들께 가려네.
이동순 詩, <홍범도 장군의 절규> 끝부분.
미디어 날 ‘홍범도의 길 탐방단(이하 탐방단)’은 8월 6일 0시를 넘어 알마티역에서 크즐오르다로 가는 중앙아시아에 몸을 실었다. 좁지만 네 명이 누워갈 수 있는 이등칸이었다. 열차 편에 따라 스물다섯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탐방단이 탄 기차는 열여덟 시간이 걸리는 급행열차였다.
3년 임기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인사 김형석 씨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크즐오르다로 가는 길에 들었다. 탐방단의 일원인 김종대 전 의원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전 대통령) 씨도 독립기념관을 세울 만큼 국민의 눈치를 봤는데, 이 정권은 기성세대의 자존심마저 무너뜨렸다”라며 “임기 안에 모든 걸 바꿔놓으려는 듯한데, 이러다가는 임기가 단축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다행히도 크즐오르다에는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과거와 미래가 척박함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크즐오르다 역사(驛舍)에는 벼 이삭을 든 추수 광경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됐음에도 역에서 뻗는 주도로의 이름은 ‘홍범도길’이었고, 시작점이 되는 건물에는 장군의 부조가 붙어있었다.
장군의 유해를 봉환한 이후에도 장군이 묻혔던 묘지는 추모공원으로 조성됐으며, 장군과 함께 유해가 봉환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의 옛 묘소와 집도 기념공간으로 남아있었다.
이번 탐방의 안내자인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은 “고려인들이 우슈토베(첫 이주지)와 크즐오르다에 내렸을 때 카자흐 사람들이 대기근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의 정착을 도왔던 것은 분명하다”라면서도 “고려인들이 시르다리야강물을 끌어와서 드넓은 땅을 개간하고 벼를 심어 이곳을 벼 곡창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벼 이삭이 이 도시의 상징물이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우리 또 만납시다”
도착한 날 저녁 만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최재형 선생의 증 외손자이자, 김학만 선생의 손자인 김알렉세이 씨와 계봉우 선생의 손녀인 계따지아나 씨, 계따지아나의 이질인 김마리나 씨, 이밖에도 현지 고려인회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김알렉세이 씨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서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바이코누르에서 왔다”라며 “머나먼 땅의 고려인들을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라며 김학만 선생이 선물로 받았다는 은잔을 가져와 탐방단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계따지아나 씨도 “중앙아시아로 이주를 당한 고려인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의 역사가 잊히지 않도록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라며 자신의 쓴 책들을 가져와 탐방단에게 건넸다.
이날 만찬의 차림은 소고기를 넣은 된장찌개와 배고자(왕만두), 증편이(증편), 찰떡이(찰떡), 질금이(콩나물무침), 가지채(가지볶음), 당근김치 등이어서 먹거리로 동질감을 느끼는 자리가 됐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이튿날(7일) 탐방단이 홍범도 기념공원을 참배하는 자리에도 함께했다. 유해를 봉환했음에도 흉상과 석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장에는 작은 기념관을 짓는 공사가 마무리 단계(9월 준공 예정)에 있었다.
이날 참배에는 후손들과 탐방단 외에도 국립 크즐오르다대학 한국어학과 10여 명도 함께해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의 조형물에 꽃을 놓고 술잔을 올리며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렸다.
탐방단 중 송인범, 이경후 씨 부부는 큰절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송인범 씨는 “오는 길에 뉴라이트 인사를 독립기념관장에 내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홍범도 장군께 죄송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큰절하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틀간의 일정을 함께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내년에 다시 만나자”라며 후일을 기약했다.
탐방단은 이날 홍범도 장군이 말년을 보냈던 크즐오르다 고려극장(현 문화궁전)과 계봉우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옛집, 연해주에서 옮겨왔던 원동고려사범대학(현 크즐오르다국립대학), 서울과학기술대학과 AI 관련 복수학위 협정을 맺은 크즐오르다 과학기술대, 옛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신문사 자리 등을 돌아본 뒤 비행기를 타고 알마티로 돌아왔다.
(이재표 미디어 날 공동대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