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6
새로운 통화, 새로운 헌법, 새로운 경제
김상욱 고려문화원장/본지주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든 핵무기 문제를 신속하게 조정했다. 그에 비해 경제와 헌법에 관한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사실, 독립 초창기 나자르바예프는 판단의 오류를 범했지만 급진적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임에 따라 비판자들은 그를 비민주적이라고, 심지어 독재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에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이 그동안 인류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회주의라는 길을 걸어갔다면, 소련의 해체 후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과정도 처음 경험해보는 미지의 길이었다.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역사와 사회경제적인 조건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거기에 더해 체제전환 과정에서 여과없이 노출된 인간의 탐욕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루블화와 관련된 위기도 예견된 것이었고 실제 카자흐스탄의 체제이행과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독립했으나 루블화 통화 공급권이 여전히 모스크바 은행가들에게 달려있었다. 지금처럼 신용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통화 혹은 카드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중앙은행이 갖고 있던 통화공급권은 일반 경제활동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앙은행장에게 내려진 비밀 명령… 텡게화 발행
이때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 중앙은행장인 갈리이 바이나자로프에게 비밀명령을 내린다. 바로 독자 화폐를 준비하라는 것. 바이나자로프는 카자흐스탄의 화가들에게 국가통화의 디자인을 만드는 임무를 부여했고, 국가통화에 적합한 명칭을 찾았다. 나자르바예프는 ‘텡게’라는 단어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카자흐의 중세에 초원지대에서 유통되었던 ‘탕가’라는 화폐에서 유래했다. 이는 러시아어 단어 ‘덴기’ 가 ‘텡게’와 어근이 동일하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도 동시에 가졌다.
보다 큰 문제는 새 통화의 제작이었다. 카자흐스탄에는 적당한 인쇄시설이 없었다. 그렇다고 러시아 조폐공장에 주문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럴 경우 비밀이 누설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침내 영국의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고 1993년 초 알마티로 최초의 견본이 비밀리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는 새로운 통화의 유통은 몇 년 더 있어야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구 소련의 루블 지역의 경제 상황에 따라 그 시기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의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상당 부분의 무역이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루블화로 결제되어졌다.
나자르바예프는 경제주권의 제한 이라는 비용을 치루더라도 카자흐스탄이 루블 지역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카자흐스탄 중앙은행은 러시아 은행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카자흐스탄의 공장들은 러시아와의 협업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또 실제 국민들의 실생활에 피해가 발생하면 안되었다.
1993년 무렵 많은 공장들이 도산했다. 이런 상황은 카자흐스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통화 공급을 약속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가 고유의 통화를 도입한다고 해도 루블 지역에 남겠다는 약속으로 화답했다.
1993년 4월 1일 러시아는 레닌의 초상화가 그려진 옛 루블화를 폐기하고 새로운 루블화를 발행할 것을 결정했을 때 카자흐스탄 배제되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카자흐스탄에는 경제적 혼란이 뎦쳐왔다. 나자르바예프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옐친과 만아 카자흐스탄을 새로운 루블 통화권에 유보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새로운 루블화의 공급 조건이 심의되는 동안, 카자흐스탄은 더 이상 통상되지 않는 엄청난 구 루블화로 넘쳐났다. 이것은 국경을 넘어오는 투기꾼들과 아직도 러시아의 통제하에 있는 카자흐스탄 내 9곳의 군사 기지에서 흘러나오는 돈이었다.
몇 주가 흐르자 카자흐스탄 사회는 구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져 국가 전체가 공황에 가까운 경제적 불안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모스크바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아르메니아, 타지키스탄과 벨라루시아의 대표자들이 신 루블 통화권 창설에 관한 합의에 조인을 하였다. 이 합의는 위 4개국에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러시아는 모스크바 중앙은행이 현금 공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각국의 예산, 세금, 관세 및 금리를 러시아와 통일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상당부분의 경제주권을 제한 당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나자르바예프는 이 조건을 수용하기로 결심하고, 1993년 10월 12일 합의 비준을 위해 카자흐스탄 국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시민들의 동요와 의회의 봉기로 옐친이 압박받는 사건들이 일어나 경제 문제는 더욱 꼬이게 되자 정부내에는 새로운 루블 통화권에 대한 합의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겨났고 급기야 이 흐름은 나자르바예프로 하여금 독자 화폐의 발행이라는 플랜 B를 가동하게끔 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새로운 카자흐스탄 통화를 신속하게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런던으로 특별 수송기를 보냈다. 이 작전은 국가안보위원회의 통제 하에 극비리에 수행되었다. 나자르바예프는 당시를 “1주일이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은행권들을 시와 주 소재 은행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작은 시골의 우체국까지 유례없이 정확하게 공급했다”라고 회상했다.
물리적 분배를 마친 후 정치적으로 선언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11월 12일 새로운 통화 도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발표를 앞둔 나자르바예프는 그 어느때 보다는 긴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텡게 도입의 당위성은 러시아 관리들의 기만과 배신 때문이라는 점을 국민의 30%를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계 국민들 앞에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스크바와이 관계 단절이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통화 도입으로 이웃 강대국과의 경제적 관계에 아무런 해가 없을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그는 세심하게 선택한 표현들로 카자흐스탄의 ‘텡게’의 탄생을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나자르바예프는 러시안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국가의 주건을 강화하는 역사적 조치라는 근거로 카자흐민족의 자긍심에 호소를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텡게화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