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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독립 35주년 기념 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의 근현대사 30]

유라시아 패권의 역사 – 2  : 300년 우정과 갈등의 시작 –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중소동맹까지

김상욱 알마티 고려문화원장/본지 주필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포괄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를 내세우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자주 함께 등장하며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응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만 본다면 두 나라는 오랜 우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두 나라는 한때 국경에서 실제 총격전을 벌였고,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을 만큼 심각한 대립을 겪었다. 오늘날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300여 년 전, 두 나라가 처음 국경을 맞댔던 순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네르친스크 조약, 두 제국의 첫 만남

  17세기 후반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 국가에서 유라시아 제국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를 횡단한 코사크들은 아무르강 유역까지 진출했고,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며 태평양을 향해 나아갔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두 제국의 팽창은 결국 아무르강 유역에서 충돌했다. 청군은 러시아가 건설한 알바진 요새를 공격했고, 양국은 군사적 긴장 속에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1689년 체결된 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은 중국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이 서구 국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통역을 맡아 라틴어를 공식 문서로 사용한 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아무르강 상류에서 철수하는 대신 양국 간 교역을 허용받았고, 청나라는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단순한 국경 협정이 아니었다. 이후 300여 년 동안 이어질 중국과 러시아 관계의 출발점이자,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첫 번째 큰 타협이었다.

  18세기 동안 양국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 조약은 국경 관리와 교역을 제도화했고, 몽골과 시베리아를 잇는 교역로는 양국 경제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는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밀려 흔들리는 사이, 러시아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아무르강 북쪽과 연해주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광대한 영토를 잃었고,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의 극동 중심도시가 된 배경도 바로 이 시기에 있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를 ‘백년국치(百年國恥)’의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당시 체결된 조약들은 모두 군사적 열세 속에서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현대 중국 외교에도 적지 않은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시선을 중앙아시아로 돌렸다. 카자흐 초원을 지나 투르키스탄으로 진출한 러시아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일대를 차례로 병합했다.

  이 시기는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 다툼을 벌인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였다. 영국은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완충지대로 삼아 제국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카자흐스탄은 단순한 변경 지역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전략적 핵심 공간으로 편입되었다. 훗날 소비에트연방 시기에도 카자흐스탄이 우주기지, 핵실험장, 중공업 기지로 활용된 것은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혁명의 동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연방이 탄생하면서 중·러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은 양국을 다시 연결하는 접착제가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갓 탄생한 신중국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국제적 승인과 경제·군사적 지원이었다. 당시 이러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소련뿐이었다.

  1950년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군사적으로 상호 지원하고 경제 개발에 협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중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고, 수천 명의 기술자와 전문가를 파견했다.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철강, 기계, 화학, 전력 등 중공업 기반을 구축했고, 이후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러한 동맹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고, 소련은 군사 장비와 공군 지원을 제공했다. 당시 세계는 두 나라를 ‘사회주의 진영의 양대 축’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견고해 보였던 이 동맹에는 이미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중국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후배 혁명국 정도로 대한다고 불만을 품었고, 스탈린 역시 중국의 독자적인 노선을 경계했다.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 주던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국가이익과 지도자의 자존심이 조금씩 충돌하기 시작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이 균열은 본격적으로 표면 위로 떠오른다. 후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추진한 ‘탈스탈린화’는 단순한 소련 내부 개혁이 아니라,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혁명의 동지였던 두 나라는 이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결국 국경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적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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