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 카자흐스탄 독립 30주년 기념 ‘유라시아의 심장, 카자흐스탄의 탄생과 성장’
카자흐스탄 도시의 변화 3
홍범도가 잠든 땅, 고려인의 도시 크즐오르다
95년의 첫인상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직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는 당시의 수도였던 알마티였다. 카자흐스탄을 방문할려면 누구든 예외없이 알마티공항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하므로 너무나 당연하다. 하물며 고려인들이 실재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고 고려인 단체들이 몰려 있는 도시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딜까? 바로 크즐오르다이다. 크즐오르다는 천산산맥에서 발원하여 중앙아시아 초원과 스텝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시르다리아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써 카자흐스탄의 남부지역중에서도 서쪽에 치우쳐 있다.
이 도시는 한때 카자흐스탄의 수도(이후 알마티로 수도가 옮겨졌다) 였고, 주변엔 큰 매장량을 자랑하는 ‘꼼꿀유전’이 있다. (이 유전의 주인은 중국의 석유회사로 바뀌었지만 크즐오르다 시민들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고용처 노릇을 하면서 지역경제을 현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37년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에 의해 허허벌판이었던 시르다리아강변이 가을이면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바뀐 곳으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벼농사지역인 것이다. 자동차로 3시간 정도의 거리에 소련시절의 우주기지인 바이코누르가 있어서 소련해체 후 이 우주기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보겠다는 정책이 한때 추진되어서 관문 공항으로써 크즐오르다가 자주 언급되기도 했었다.
나는 이미 초겨울의 추위가 느껴지던 95년 10월에 처음으로 크즐오르다를 방문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크즐오르다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강수량 부족으로 바짝 말라버린 초원(스텝)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시르다리아강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크즐오르다는 아침, 저녁으론 한기가 느껴졌고 낮에는 늦여름의 강한 햇살이 내리쬐이는 적응하기 쉽지 않는 날씨였다.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혼란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내게 보여줄려는 듯, 도시는 낡고 거리는 지저분했었다. 아파트 뒷 골목엔 쓰레기들이 아랄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고여있는 웅덩이들 때문인지 밤에는 모기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활개쳤다.
나는 그때 크즐오르다국립대학교를 방문하여 한국어과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했고 이들과 한국어로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리고 동포 지도자들의 초대로 만찬문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주동일 할머니의 전설적인 30분짜리 또스트(건배제의) 경험한 것도 이 날이었다.
다음날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를 동포지도자들과 함께 참배했었다. 당시 한국은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시절이었기 때문에 해외독립유공자들의 유해를 국내로 안치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한국으로 가져가기 위한 작업이 진행중이었던 것이었다. 이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고, 하여튼 이틀 동안 머문 크즐오르다에 대한 나의 첫인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루에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지저분하고 바람부는 도시’ 였다.
그 후 2년 뒤 다시 한번 방문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크게 나아진 건 없었다. 그 때는 여름이었는데, 크즐오르다의 모기는 청바지를 뚫고 피를 빤다는 걸 처절히 체험하였다.
변신 그리고 황금벌판
세번째 방문은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한국 방송(KBS)의 취재를 돕기 위해서였는데, 난 이 도시의 변화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항에서 도시로 향하는 도로는 아스팔트가 새로 깔려 있었고, 도시는 너무 걔끗하게 정비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건물들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과거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생동감과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부산’, ‘아리랑’ 등 고려음식을 하는 식당들도 눈에 띄었고(사실 크즐오르다의 요식업은 고려인들이 거의 장악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내에 까레이스끼 까페 가 많다) 호텔은 저렴하면서도 깔끔하여 여행자들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 부턴 난 크즐오르다 출장을 즐기게 되었다. 이후 난 틈만 나면 크즐오르다를 방문하였다. 홍범도장군이 계시고, 빅토르 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르다리아 강이 있고 무엇보다 연해주에 있던 원동조선사범대학이 강제이주로 옮겨와서 현재로 크즐오르다 국립대학교가 된 곳에 한국어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사회주의 노동영웅 최정학 선생을 위시한 모든 고려인들의 땀으로 중앙아시아 최대 벼생산지가 된 곳이 이곳이지 않는가?
난 거의 매년 크즐오르다를 방문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홍범도 장군이 안장되어 있는 크즐오르다시 홍범도 장군 묘역에 들러 참배한 뒤 인근에 있는 ‘아방가르드’와 ‘제3인터내셔날’ 등 고려인 꼴호즈를 방문하여 고려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크즐오르다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시간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제3인터내셔널’ 꼴호즈는 날 자주 유혹했다. 8월말경에 방문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벌판에 마치 손톱만한 크기의 콤바인과 트럭이 벼수확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손톱만큼 작아 보이던 콤바인은 다가갈수록 굉음의 크기만큼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오는 경험을 해 보시라. ‘끝없는 지평선에선 거대한 트럭과 콤바인도 이렇게 작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추수를 하는 작업반원들 그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시라. 내가 한국에서 왔는데,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우며 ‘까레이츠 말라짓’이라고 하면서 인터뷰에 응해준다. 지금은 카자흐인들이 농장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이 과거 자신들의 작업반장이나 꼴호즈 조합장이었던 고려인들에게 배운 고려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술이(술)’, ‘밥이물이(밥을 물에 만 것)’ ‘개장국(보신탕)’ 등 고려말 어휘들을 접할 수 있다.
3천 헥타르(약 1천만 평)정도의 논을 가진 농장들이 끄즐오르다 주변에는 수 십 개 있다. 제3인터내셔날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고려인 꼴호즈가 있는데, 바로 ‘아방가르드’이다. ‘아방가르드’꼴호즈는 당시 크즐오르다에 있던 조선극장의 배우였던 리 함덕(고려인들 사이에서는 춘향 ‘함덕이’로 더 잘 알려진 인민배우), 리 니콜라이의 고려말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는 국가홍보영화의 촬영장이기도 했다.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에 이 꼴호즈가 선택되어질 정도로 생산성이 뛰어난 농장이었던 것이다.
빅토르 최의 고향… 자주 방문하고픈 크즐오르다
지금으로 부터 31년 전인 1990년 8월 15일, 80년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빅토르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소련 전역에서 추모행사가 열렸고 장례식이 수차례 연기될 정도로 그 열기는 뜨거웠다. 빅토르를 따라가겠다고 5명의 팬들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열성 팬 30여 명이 무려 4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20세기 대중음악의 선두였던 록음악을 통해 소련 젊은이들을 열광케 만들었던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최대 거주지였던 크즐오르다에서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가족과 함께 뻬쩨르부르그로 이주했지만 그는 어린 시절 물장구 치면서 놀았던 시르다리야 강에서의 추억을 잊지 않고 고려인의 정서를 작품에 녹여 내었다.
이러한 그의 노래는 80년대와 90년대 전반기 소련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한마디로 80년대 러시아의 문화현상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의 음악성의 원천은 바로 이 시르다리야 강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을 하면서 시내를 걸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시내를 걷다보면 크즐오르다 기차역에 닿게 되는데, 역 뒤 고가다리를 건너면 홍범도 거리를 만나게 된다. 거리 초입에 있는 건물 벽에는 장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부조판이 붙어 있다. “이 거리는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항일 빨치산 대장이었다가 1937년 크즐오르다로 이주해 온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입니다” 라고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이 거리 뿐 아니라 옛 조선극장 자리, 옛 조선원동사범대학, 그리고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묘지와 그들의 영웅적인 스토리들이 크즐오르다에 각지에 흩어져 있다. 이를 동포사회가 나서서 보존, 관리하고 또 스토리텔링 작업을 한다면 현지인들도 기꺼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지난 27년간의 크즐오르다 변화발전상 못지 않게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스토리가 발굴되고 관리되어진다면 더 자주 이 도시를 방문 할 것 같다. (김상욱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카자흐스탄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