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모습으로 알마티에서 다시 만나요"
(알마티=한인일보) = 지난 3월17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중심에 위치한 콘서트장.
알마티 현지 한류팬들은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무대에 오른 한 뮤지션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아이돌그룹의 해외 콘서트 현장 같았다. 콘서트 내내 환호성은 이어졌고 해당 뮤지션의 이름을 자신의 휴대폰 화면에 띄우거나 직접 손으로 쓴 피켓을 들고 나온 팬들도 있었다.
그의 무대에는 통역도 함께 섰다. 노래 한 곡이 끝나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직전 그는 자신이 부를 노래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자신이 직접 쓴 노래말과 곡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1층 홀은 물론이고 2층까지 꽉 찬 관객들은 휴대폰으로 그를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담기 위해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했다. 어떤 팬은 카자흐 전통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또 어떤 팬은 꽃다발을 그에게 선물로 안겨주었다.
그가 빅토르 최의 '뻐꾸기'를 부르자 팬들이 함께 떼창을 부르기도 했다. 그의 친구인 카자흐스탄의 인기 가수 미라스와 함께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바로 싱어송라이터 송원섭(36)의 카자흐스탄 공연 현장의 모습이다.
공연장 대기실에서 만난 그는 마침 현지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카자흐 통역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였다. 그는 경쾌함과 미소를 잃지 않고 여성 리포터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
인터뷰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어권에서 인기가 높은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우연히 러시아 유튜브 영상을 보고 댓글을 달고, 러시아 곡을 커버했더니 며칠 만에 구독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경험을 했어요.”면서 “몇 년 전에 홍대에서 술 마시다가 10만 러시아 유튜버를 알게 됐어요. 내가 찍은 영상이 그 친구 채널에 소개되고 내가 거기에 댓글을 달기도 했죠. 리액션 컨텐츠를 하라는 얘기를 그 친구로 부터 들었구요. 결국, 유튜브를 통한 저의 이런 활동 때문에 러시아어권에서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2019년 모스크바 콘서트를 하게 되었고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올해 이렇게 카자흐스탄 콘서트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카자흐스탄의 한류팬들이 무척 많은데, 그 중에는 고려인 젊은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늘의 인터뷰도 알마티 콘서트 계획을 미리 안 고려인 팬들의 성화에 못이겨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사실이었다. 카자흐스탄 투어 계획이 세워지자 마자 현지의 팬들은 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고, 그런 요구는 나로 하여금 가수 송원섭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러시아의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카자흐스탄의 현지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방영되었는데 그 다큐에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러시아어로 부르는 그가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3년 전 쯤에 한국 문화에 대해 영상을 찍으러 온 러시아 PD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 러시아어 노래를 불러보라는 제안을 받고 찍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최의 노래를 ‘꾸꾸쉬까(뻐꾸기)’ 를 비롯해 6곡 정도를 불렀어요.”
많은 러시아 가수들이 있고 인기있는 러시아 노래가 많은데, 왜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불렀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빅토르 최에 대해서 예전에는 전혀 몰랐어요. 그러나 빅토르 최가 당시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 가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노래에 관심이 갔어요. 특히, 한국어로 번역해서 부르기 보다는 러시아어 원어 그대로 부르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비록 러시아어를 모르지만 배워가면서 그의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면서 가사를 음미한 후에 제가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 비로소 노래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의 노래를 제가 창의적으로 편곡을 해서 부르기도 했어요”
사실, 빅토르 최를 ‘러시아 록음악의 전설’이라는 단어로만 소개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추진했던 소련의 개혁정책이 한창이던 80년대 후반, 그는 그 당시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변화와 개혁이라는 사회분위기를 온 몸으로 표현한 인물이었다. 그 자체가 바로 문화현상이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90년대를 대표했던 서태지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는 1962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흘러내려 만든 거대한 시르다리야강을 보면서 자랐다. 이 강물을 끌여들여 벼농사를 성공시킨 할아버지 세대들의 땀방울을 보면서 그는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최는 19세 때 록 그룹 '키노'(Kino)를 결성해 약 9년 동안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러시아 특유의 선율에 소련의 압제적 분위기에 맞서는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그의 음악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최는 일약 소련 록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혈액형’ ‘마지막 영웅’ ‘변화’ 등 수많은 히트곡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러시아 음악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인기 절정에 있던 그는 1990년 8월 순회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리가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공식 사고 원인은 졸음운전으로 발표됐으나 일각에선 타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8월 15일 되면 지금도 그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이 알마티의 아르바트 거리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추모공연이 열린다.
우리는 이렇게 빅토르 최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10여분의 시간을 보냈다. 잠시 잊고 있던 인터뷰어의 신분을 깨닫고 인간 송원섭과 그의 카자흐스탄 콘서트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ㅇ. 아스타나, 침켄트에서 이어 알마티에서 카자흐스탄 투어의 마무리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이전 공연은 어땠나?
“아스타나와 침켄트 콘서트를 성황리에 잘 마쳤어요. 아스타나의 경우 음향시설이 대중음악을 공연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만족스러운 공연을 했고 침켄트 공연도 잘 마쳤어요. ”
ㅇ. 카자흐스탄에 대한 인상은?
“가수 입장에서는 이번 카자흐스탄 콘서트가 처음이다 보니까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많이 되었어요. 그런데 카자흐스탄 투어가 잘 시작되었고 성황리에 마무리되니까 이제는 마음이 매우 편해졌어요. 이번 투어를 통해서 느낀 점은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마음이 매우 따뜻하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아티스트로 왔기 때문에 잘해주는 것일 수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감정으로 저를 대해주셨어요. 전혀 불편한 것이 없었어요.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카자흐 사람들은 마음이 열려있고 순수한 것 같습니다.”
ㅇ.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큰 활동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신문인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을 유지하면서 우리 전통문화와 풍습을 지켜나가고 있어요. 특히, 올해는 고려일보창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죠. 혹시 고려인 동포들은 만나보셨어요?
“솔직히 저는 고려인에 대해서 예전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고려인 가수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고 그 이후에 제 스스로 고려인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죠. 강제이주라는 아픈 역사가 있잖아요. 저 뿐만 아니라 한국사람들은 고려인 동포들에 대해서는 감싸 안아주고 싶어해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제가 러시아어를 잘 할 수 없어서 동포들에게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고, 그들의 사연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에요”
ㅇ. 카자흐스탄 팬과 러시아팬들과 차이가 있다면?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는 것 같구요, 아스타나에서 공연할 때 제가 느낀 것은 제 공연에 오신 분들의 연령대가 다양했어요. 어머니가 좋아해서 딸을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어요. 모스크바 공연 때는 젊은 팬들이 많았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이 오는 이유는 30여년 전 인기 가수였던 빅토르 최 노래를 제가 편곡해서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ㅇ. 모스크바 콘서트는 어떻게 성사가 된 것인지요?
“사실 저는 러시아와 인연이 많지 않아요. 모스크바는 지금까지 두 번 밖에 못가봤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에 러시아 팬들이 자신들이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 왔습니다. 버디야라는 러시아의 100만 유튜버도 자기도 모스크바에 가니까 꼭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래서 항공료만 내가 부담해서 모스크바로 떠났고, 나머지 숙박과 공연장 섭외는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줬어요. 그게 2019년이었습니다.”
ㅇ. 가수 송원섭이 오늘이 있기 전에는 최고의 트럼보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구요?
“네, 사실 저는 노래를 잘 하면 것으로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고등학교때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학 시험도 다 떨어졌어요. 그 시절 친구집에 놀라갔다가 기타 소리에 반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ㅇ. 처음 꿈은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군요?
“네, 당장 짚 앞 기타학원에 등록하고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태어나서 뭔가에 처음으로 몰입했던 시기였습니다. 얼마나 기타 빠졌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기타학원에서 살았어요. 그때 제 나이가 20살, 21살 무렵이었죠. 푹 빠지니까 제가 느끼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늘었고 그때 제 꿈이 최고의 기타리스트였습니다.”
ㅇ. 그런데 왜 진로를 바꾸게 되었어요?
“21살 때였어요.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를 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는 군악대를 가고 싶었죠.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기타가 아니라 트럼본으로 군악대에 갈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역시 저는 미친듯이 연습을 했고, 실력을 키워 결국 주변의 인정은 물론이고 원하던 대학에도 트럼본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틈틈히 제 곡을 만들기도 했고 세계적인 트럼보니스트의 연주 시디를 사서 연습을 열중한 결과 방송출연 제의도 받게 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저의 트럼본 연주를 들어본 선배들의 추천으로 가수 윤도현씨가 진행하던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죠. ‘나가수’라는 프로에 나가기도 했지요. 당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는데, 이때까지는 제 꿈은 최고의 트럼보니스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잦아지던 무렵 제 노래를 들은 선배 형으로부터 노래를 한번 불러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이후 연주자가 아닌 가수로서 활동할 기회가 생겼어요.그러나 가수로서의 삶은 힘든 일의 연속이었어요. 가수의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지요. 그 무렵 2018년 새해 첫날 저는 한가지 다짐을 했어요. 영어공부를 해보자 결심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러시아 친구가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ㅇ. 비록 꿈은 바뀌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대단했고 또 타고난 소질이 아니라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현재의 꿈은 무엇인지요?
“저는 현재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서 더 유명해지고 싶진 않아요. 제가 노래를 한 곡 했는데,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니까 저도 보답해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에요.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싶잖아요. 그래서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유튜버 방송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에요. 하다보면 언젠가는 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콘서트도 수익금은 전액 카자흐스탄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결정하진 못했습니다만 가능하다면, 카자흐스탄의 어린이를 한국에서 데려와서 치료를 해준다거나, 아니면 고아원을 돕고 싶어요.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당신의 노래 때문에 힘을 얻고 있어요> 이것은 인터뷰 중인 지금 방금 들어온 유튜브 댓글이에요. 저는 저의 노래와 공연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은 게 저의 꿈입니다”
ㅇ. 선한 영향력 끼치고 싶다는 꿈… 참 인상적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길 저도 기원하겠구요.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 해야 할 것 같은데, 카자흐스탄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음달 (4월)에 다시 한번 알마티를 방문할 계획입니다. 카자흐 친구 가수의 초청으로 와서 합동공연을 할 예정인데요, 좀 더 나은 모습, 좀 더 준비된 곡으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ㅇ.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