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8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러–카자흐간 갈등의 원인이 되다.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본지 주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바이코누르는 카자흐어로 ‘약초가 많은 갈색 땅‘을 의미한다.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밝게도 어둡게도 할 요소 중 핵심적인 세 요소를 꼽으라면 러시아, 중국, 카스피해의 석유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는 초강대국 러시아와 중국은 신생국 카자흐스탄에 때로는 협박을 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달콤한 유혹의 손짓을 보내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은 국경 문제를 놓고 이웃의 초강대국을 자극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익에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압력에 양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자흐스탄은 카스피해에서 미국석유회사 및 국제 송유관 콘소시엄과 상당히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웃한 중소 주변국들은 정치적 경쟁심과 동시에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독립 초기, 카자흐스탄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우크라이나와 같은 독립국가연합(CIS)들 가운데 가장 선두에 위치해 있었다. 경제적 개혁과 정치적 안정 측면에서는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이 시기 신생국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빅 게임’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했다.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놓고 러와 갈등 발생
카자흐스탄은 루블과 텡게화의 통화 쇼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키자 마자 보리스 옐친 정부와 관계를 긴장시키는 또 하나의 분쟁이 발생했다. 그것은 우주발사기지 바이코누르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시절 미국과 함께 우주 패권을 다투던 핵심적인 장소였던 이 기지는 양국간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바이코누르의 폐쇄를 요구하는 카자흐스탄의 여론은 모스크바 지도부를 격노하게 했다.
러시아인들이 소련의 우주 연구 계획의 핵심인 바이코누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당초부터 바이코누르는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기지로 건설되었다. 후에 그 역할이 수정되어 수많은 우주선들의 역사적 발사를 위한 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1957년 지구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그리고 1961년 유리 가가린에 의한 최초의 궤도 비행, 1963년 최초의 여류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비행과 뒤이은, 소유즈, 프로톤, 치클론 과 같은 우주선 발사가 있었다. 당시 이러한 업적은 미국의 유사한 프로그램을 앞질렀다. 그래서 러시아 국민과 학자들 특히 바이코누르에서 우주 연구계획을 주관했던 사람들에는 커다란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원래 바이코누르 는 카자흐어로 ‘약초가 많은 갈색 땅’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랄해로 부터 동쪽으로 약 120마일 떨어진 초원 지역의 비옥한 지대를 상징한다. 소비에트 정권은 그곳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처음엔 레닌스크라 불렀다. 길이 약 60마일, 폭 약 50마일에 이르는 지역을 소련군 사단이 지키던 기지에 소련은 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군인들을 정착시켜 완벽한 도시를 건설했다.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생태환경적 이유를 들어 우주 기지의 폐쇄를 요구했다. 특히, 아랄해의 고갈과 군사기지 주변의 농경지 파괴라는 환경보호 차원과 함께 지리적 위치상 우주기지에 대한 관할권이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바이코누르를 건설한 것이 바로 그들이고 40년 이상 그것을 관리해 왔고 그것을 세계적 규모의 특수한 과학센터로 변모시켰으므로 우주기지는 여전히 그들의 관할 하에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사이에서 심한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양측이 1992년 우호와 협력에 대한 조약에 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코누르는 양국 관계을 악화시킬 수 있는 발화점이었다.
1994년 3월, 이 문제를 놓고 양국 정상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젊지만 노회한 나자르바예프는 현장의 상황을 잘 챙겨서 갔지만 옐친 또한 사전준비를 철저히 잘 했다. 오랜 협상 끝에 양국 정상은 20년간 임대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다만, 미리 조율해 놓은 협정문안에 연간 임대료 1억 1천500만 달러 라는 문구가 본문에 삽입되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의 전기에서 이때를 회상하면서, 바이코누르에 관한 어렵고 중대한 협약의 조인은 보드카를 곁들인 격의 없는 소통 방식 때문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바이코누르에 대한 양국간 신속한 합의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것이며 지루한 협상과 오랜 대결보다는 신속한 합의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당사국들이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 국회와 카자흐스탄 국회를 포함하여 격렬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는 고비를 잘 넘겼고, 첫 기지 임대료는 5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우주 연구 계획은 계속되었고, 카자흐스탄의 학자들과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 연구와 조종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