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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바예프와 카자흐스탄의 건국 9

누가 카스피해와 대륙붕의 석유를 차지할 것인가?

김상욱 

고려문화원장/ 본지 주필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가장 어려웠던 문제를 꼽으라면 단연 카스피해의 석유룰 룰러싼 갈등이 꼽힐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 국가재정을 받쳐주는 든든한 달러 박스이자 지정학적 어려움속에서도 국제사회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하게 만든 카스피해의 석유자원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당연히 모스크바의 석유산업부 관료들이 계속해서 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소련의 해체로 빚어진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에는 카스피해의 석유가 얼마나 많이 매장되어 있는지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는 중앙아시아 정치 지도자 중 카스피해의 석유 매장량이 막대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탁월한 외교력과 협상력 그리고 지혜를 총동원해서 카자흐스탄을 21세기 최대 산유국의 하나로 국제사회에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T-35 유전 사고 – 카스피해 유전에 대해  뜨는 계기

  사실 그  시작은 카스피해의 한 유전에서 발생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T-35로 알려진 카스피해 연안의 한 광구에서 화재에 뒤이어 고온의 석유가 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가 발생한 1985년 7월은 나자르바예프가 카자흐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였다.

  경험도 부족하고 총리로서는 젊은 나이(당시 45세)였던 데다 카자흐스탄이 소련의 일부였던 상황에서 그는 모스크바의 석유산업부가 주관하다 실패한 사건의 목격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약 200미터까지 뜨거운 불기둥이 치솟고 그것을 진압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린 것을 두고 석유전문가들이 ‘세기의 분수’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나자르바예프는 카스피해에 매장된 석유량이 상상 이상의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스피해의 잠재력에 대해 나자르바에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스크바 석유산업부의 지질학자들 중 소수에 불과했다. 소련의 정치지도자들이 유전 규모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그 무렵 그들은 공산주의 제국의 붕괴 위기에 함몰되어 다른 문제들을 장기간에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카스피해의 석유개발은 시급한 것이 아니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90년 미국방문 중 텡기즈 유전 개발에 관해 미국석유회사 세브론과 협약에 서명했지만 모스크바 석유자원부와 세브론간의 교섭과정에서 용두사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교섭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던 1991년 7월, 나자르바예프는 텡기즈 유전에 대한 교섭 권한을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이 가진다는 통보를 했다.

   “이 순간부터 유전에 대한 통제권은 카자흐스탄이 가진다”라는 단호한 편지를 고르바초프에게 보냈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의 협상가들이 세브론사로 부터 더 나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지 선듯 양보를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소련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 조약을 만드는 일로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된 각 공화국 지도자들과 힘든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논쟁을 중재하도록 나자르바예프에게 도움을 청했고 나자르바예프는 고르바초프를 도왔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브론사와의 거래에 관한 권한을 카자흐스탄 쪽으로 이전한다는 이면 약속이었다.  

  나자르바예프가 텡기즈 유전의 협상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모두들 그와 직접 대화하기를 원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1991년 7월 20일 모스크바를 국빈 방문했을 때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고르바초프는 즉시 소련 공식사절단에 그를 포함시켰다.

  석유산업가였던 부시는 텡기즈 유전에 관한 소련과 미국간의 첫번째 원탁회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세브론 사가 그곳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이 붕괴되기 전이라서 그나마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되자 이때까지 카스피해 원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국가는 이란과 소련(실재는 러시아)이었지만 갑자기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이 추가되어 5개국으로 늘어났다.

  이 5개 카스피해 연안국들의 권리가 합의되지 않고 법적으로 정리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추나 탐사가 어렵고 외국 은행과 투자자들은 개발자금을 제공하기 어려웠다.

  소련의 해체 후 1~2년간 모스크바 석유산업부는 카스피해 연안의 육상 유전들이 카자흐스탄의 영토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5개 카스피해 연안국 외무부 차관이나 다른 고위직을 대표로 하는 회의가 1992년 부터 1998년 까지 매월 이루어졌으나 해결책을 도출해내지는 못했다.

  이 문제 해결은 1998년 7월 5일, 옐친과 나자르바예프 두 정상의 사적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좋은 보드카를 마시며 진행된 대화에서 마침내 카스피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문제와 마찬가지로 1:1 정상외교가 빛을 발한 자리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기존의 ‘카스피해는 호수이다’라는 주장, 이란과의 1921년 조약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모두 철회하고 큰 틀에서 북 카스피해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권리를 두 국가의 지리적 ‘중간선’ 즉, 두 나라 사이의 해저에 따라 나누자는 원칙에 따랐다.  

  1998년 7월5일 밤과 6일 새벽 사이에 맺은 양국 간 합의는 카스피해 북쪽 지역을 놓고 벌인 다년간의 논쟁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막대한 부를 카자흐스탄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행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 5월, 아티라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스피해상에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세계 6위 규모의 텡기즈 유전보다 더 큰 카샤간 유전이 발견되자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의 독립과 번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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