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희 시인
팔순의 여가수가 노래를 한다. 나이를 믿기 힘들 만큼 곱고 아름답다. 여가수는 ‘사할린’이라는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운다. 일제 때 징병으로 사할린에 끌려가 그토록 염원하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울면서 노래를 한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한복판에서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 문공자. 고려극단 가수이다.
남편 김겐나지 님이 곁에서 기타를 친다. ‘아리랑 변주곡’을 연주하고,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담은 민중노래도 연달아 부른다. 고려극장 극장장으로 1800년대 말부터 고려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기록, 정리하는 분이다.
알마티 시내에서 보았던 ‘고려극장’은 홍범도 장군의 발자국이 찍혀 있을 그 극장은 아니었다. 그 극장은 크즐오르다에 세웠었고, 1962년까지 고려극단의 무대였다가 지금은 ‘크즐오르다 시립문화궁전’으로 쓰이고 있단다.
유랑극단으로 고려인들이 사는 곳 어디든 찾아가 나라 없는 설움 속에서도 우리의 흥과 멋을 함께 누리었다가, 어찌어찌 2018년에 소련 시절 필하모니 건물로 쓰이던 지금의 고려극장에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알마티에 있는 고려극장 입구에는 낯익은 탈바가지 사진과 함께 한국어, 카자흐스탄어, 러시아어로 쓰인, 공연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반갑다.
극장 안, 작은 전시공간에는 사진, 군복 등 홍범도 장군의 흔적과 고려극장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었고 인기가 높았던 춘향전 의상과 심청전 등의 소품들, 연극 대본 등을 볼 수 있었다. 연극 ‘날으는 홍범도’, ‘흥부와 놀부’, 북춤, 장구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분장과 의상을 한 고려인들을 여기에서 만나다니!
나라 잃고 떠돌던 디아스포라, 해방이 되어서도 조국에서는 이들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싸가지없는’ 조국도 조국이라고 잊지 못해 끝끝내 모국어로 노래하고 서러울수록 화려한 의상을 입고 그리운 조국, 그때 거기서 함께 했던 우리의 해학과 흥과 가락을 지켜나갔다. 아, 손을 놓쳐버린 우리의 형제들이여!
노래 할 수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모여서 함께 놀 수 없다면 사람들은 이미 삶의 불행에 잡아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은 함께 노래하고 웃고 울고 즐기며 버텼다. 그렇게 삶을 이겨내고 불행을 이겨내고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다. 조국이 버렸어도 땅이 있는 곳이 조국이다, 동포가 있는 곳이 조국이다. 이들은 끝내 이겼다. 지금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만년설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알마티 뒷산 천산산맥의 침블락에 올랐다. 곤돌라를 두 번 갈아타고. 그러나 곤돌라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을 보고는 그만 실망과 우울에 빠지고 말았다. 기어기어 오르지 않고 차 타고 곤돌라 타고 만년설을 보고자 했던 내 심보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 신성한 산에는 곳곳에 식당과 호텔이 들어서 있고, 그를 위한 포장도로가 중턱까지 나 있었다.
만년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곤돌라를 세우는 것만으로 최소화해야 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와서 밥 먹고 잠자고 해야만 할까? 중앙아시아 그 목마른 땅에 강줄기를, 에미 젖을 내려주는 물의 시원(始原)을 이렇게도 할퀴고 헤집어 놓아야만 했을까?
자본의 힘은 사납고도 무자비하고 파괴적이다. 결국 지금 지구는 그 때문에 가뭄, 홍수, 기후위기, 극한 폭염… 불의 지옥을 지나고 있다. 곳곳에 물의 신상(神像)을 모셔도 모자랄 판에 이 신성모독의 현장이라니!
자본은 낭떠러지가 코앞이라도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고도 도시의 벽에는 유목민과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는 사진과 벽화를 그려놓았다. 수천 년 변하지 않은 유목민 삶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중앙아시아에도 자본의 탐욕스런 손아귀는 비켜가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죽이 맞아서. 지구상 어디인들 다르겠는가.
그럴수록 그립다. 욕망보다 신성함이 우선이었던 그 ‘오래된 미래’가. 행복이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난을 선택한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척박한 땅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는가? 그들에게, 아니 모두에게 간절한 물. 그 물을 그토록 꾸정꺼려 놓은 죄는 누구의 것인가. 죄받을 것이다. 아니, 이미 받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물은 “수”라고 발음했다. 익숙해서 잊지 않을 단어다. 중앙아시아의 모든 물은 천산산맥에서부터 온다. 그 눈 녹은 물에서 온다. 이 메마른 땅에서 물은 ‘하늘님’이다. 천산산맥의 최고봉은 해발 7,000미터 높이의 한탱그리봉. ‘한’은 우리말에서 ‘높다, 크다, 넓다, 많다’를 뜻한다. 유목민들의 ‘탱그리’는 우리의 ‘하늘, 한울님, 하느님’이다. 낯설지 않다.
나의 시원(始原)은 어디일까? 수천, 수만 년 이어진 ‘나’는 여기 천산산맥 아래에 와서 그 고향을 알아보고 있을까? 그래서 몸이 감지를 하고 반응을 했을까? 이 여정에 함께 따라다니는 신명(神明)은 나를 또 어디로 이끌고 있을까?
가야겠다, 바이칼호수로. ‘복본(復本)’의 꿈을 지닌 사람들이 흰옷 입고 한반도를 향해 나섰다는 바이칼호. 샤먼 섬 어디쯤에 서면 천지 가득한 신명들이 원없이 나를 두드릴 것도 같다. 일행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혼자 가야겠다. 신명들이 내 몸에 흠뻑 내려앉을 때까지, 그리하여 내가 환히 보일 때까지 한없이 앉아 있어보아야겠다.
-끝-







